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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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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태규 명리학 <113>

정화의 남해 원정

이번에는 중국 명대(明代)에 있었던 정화(鄭和)의 남해(南海) 원정에 관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읽어가다 보면 이 사건에 대한 음양 오행적 해석임을 아시게 될 것이다.

정화의 남해 원정이란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중국 명조의 황제였던 영락제의 명을 받아 전후 7회에 걸쳐 대선단(大船團)을 지휘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서남아시아에 이르는 30여 국에 원정하여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한 일을 말한다. 이 일이 있은 후 60 년이 지나지 않아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는 1492 년, 콜럼부스에 의해 신대륙 발견이 있었다.

두 일은 모두 바다로 진출한 사건이다. 하지만 정화의 원정은 그 자체로서 끝이 났고, 신대륙 발견으로 상징되는 유럽의 해양 진출은 그 뒤 수 백년에 걸쳐 전 세계가 유럽의 지배를 받게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16 세기 이후의 근대사란 유럽에 의한 세계 제패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화의 항해와 콜럼부스로 대변되는 유럽의 해양 진출에 대해 이처럼 상이한 결과를 낳은 점에 대해 그간 많은 학자들이 그 이유를 설명해왔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음양 오행의 견지에서 그 이유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이 것이 오늘 글의 주제이다.

정화의 함대는 배의 크기나 조선술, 항해술 면에서 역사상 최선진의 영역에 달해있었다. 제1차 원정 당시만 해도 62 척의 거대한 군선에 장병 2만 7800여 명을 실었다고 하며, 큰배에는 무려 500 명도 넘게 탔었다고 한다. 그 당시 유럽 역시 바다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었는데, 배의 규모나 조선기술에서 정화의 함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유럽의 배는 큰배라 해야 수용능력이 기껏 100 명을 넘기 어려웠다. 지금으로 치면, 유럽의 배가 소형 구축함이라면 정화의 선단은 항공모함이나 전함 급이라 할 수 있다.

수 차례에 걸친 정화의 원정은 멀리 아프리카 서안과 홍해, 그리고 오늘날의 걸프 만까지 이르렀다. 심지어는 정화의 함대가 인도양이 아니라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까지도 갔었다는 주장을 펴는 서양인 사학자도 있을 정도다.

30 년에 걸친 정화의 해양 원정이 있은 후, 불과 60 년 뒤인 1492년에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이 있었다. 콜럼부스의 항해는 인원이나 배의 규모 면에서 정화의 함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상징되는 유럽세력의 해양 진출은 그 뒤 얼마 가지 않아, 서인도 회사를 통한 신대륙의 식민화와 동인도 회사를 통한 아시아에 대한 진출 그리고 식민화가 맹렬하게 진행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유럽의 해양 진출은 인도와 동남아 일대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이 있은 1492년으로부터 360 년(60 갑자가 여섯 번 이어지는 세월) 뒤에 가서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치욕을 당하고, 일본은 미국의 검은 함대에 의해 개항을 요구받게 된다.

이로 인해 중화로 대변되던 동아시아 세계와 무굴 제국의 남아시아, 무슬림의 서아시아 세계는 사라지고, 아시아 아프리카는 그저 유럽 열강들의 땅따먹기 각축장으로 변해버렸다. 그 이후 오랜 전통과 문화를 자랑하던 비(非)유럽 세계는 강요된 근대화(서구화)의 압력 속에서 21 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자신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에 급급하다. 우리 역시 여전히 한 때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 불렀던 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분단된 남북한의 현실이 이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유럽이나 영미가 아니면서 그나마 치욕의 역사를 지니지 않은 나라는 일본이 유일한 케이스라 하겠다. 미국과 태평양전쟁에서 싸우다 지긴 했지만, 그것은 어쨌거나 당당히 싸우다 진 결과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일본과의 악연이 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일본이 디플레에 빠져있어 유럽이나 미국 등이 다소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우리마저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은 여전히 우리가 배울 점이 많은 이웃 나라이자 강대국인 것이다.

다시 이 글의 주제로 돌아가서, 왜 정화의 해양 원정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테크놀로지를 지니고 있었건만, 그냥 단순한 바다 원정으로 그쳤고, 유럽은 열악한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훗날 전 세계의 패권을 쥐게되는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이다.

좀 더 말하면, 유럽의 배는 지중해의 바람에 맞춰 돛이나 항해술이 개발되었던 것이라 무역풍을 타야하는 원양 항해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항해술 역시 인도양 무역에 능한 아랍인들의 항해술이 높았지만, 나침반이 중국의 발명이듯이 중국은 인도양의 항해에 대단히 능란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일에 대해 음양 오행의 견지에서 설명을 제시하기 전에, 그간의 학자들 생각을 간단히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중국은 그 자체로서 거대한 세계였기에 해양 진출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인데 이는 대단히 정확한 지적이다. 정화의 함대는 그 엄청난 위용을 앞세워 남해(이는 중국인들의 용어이고, 동남 아시아와 인디아가 있는 인도양을 말한다) 각지의 군소 나라에 대해 진무(鎭撫)차원의 외교를 펼친 것이다.

이는 명태조 주원장의 유훈에 명시된 국제정책에도 명확히 나타나있다. 중국은 없는 것이 없으니 그저 이웃 변방의 나라들이 중국을 소란케 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며, 만일 말을 듣지 않는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혼을 내 주어라 하는 것이 그 요지이다. ‘변방의 나라를 점령한다 해도 변변한 물자도 없기 쉬우며, 있다고 해도 그 사람들을 마침내 부릴 수 없으니 공연히 대외 침략 전쟁을 섣불리 수행하지 말라’고 명 태조는 유훈을 통해 당부하였던 것이고 이는 그대로 국책의 기본이 되었다.

명의 세 번째 황제였던 영락제는 쿠데타를 통해 황권을 쥔 인물인 만큼, 역동적인 대외 확장책을 택했고, 정화의 원정도 그런 취지에 따라 시행되었기에 이례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락제 이후의 황제들은 태조의 유훈을 따라 해양 진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 바람에 정화의 남해 원정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그저 함대의 위용을 이용한 단발성 진무선린 외교로 끝이 나 버린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음양 오행의 견지에서 이 일을 설명해 보자.

기본적으로 유럽, 특히 서구는 오행상 금에 해당되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영국이나 미국은 물의 나라에 해당된다. 금은 힘을 내면 물(水)를 생(生)하게 된다. 이런 탓에 유럽의 서쪽 끝에 위치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그리고 원래 항해 민족인 바이킹의 후손인 영국이나 네델란드는 물에 능하고 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미국도 물론 물의 후예들이다.

그 결과 대서양이 열리고,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양으로 나가는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자, 그들은 어찌 보면 무조건적으로 그냥 물이 좋고 먼바다가 좋게만 느껴지는 맹목적인 열정에 이끌려 바다로, 그리고 더 먼 바다로 나아갔던 것이다.

예전에 ‘롱쉽(Long Ship)'이란 영화가 있었다. 롱쉽이란 바이킹의 배를 말하며, 바다 저 멀리 왕국이 있고, 그 왕국에는 집채만한 황금종이 있으니, 가서 그 황금종을 약탈해오려고 바다로 나서는 바이킹들의 열정을 그린 내용이었다.

겉으로야 유럽 각국이 무역시장을 열고 원료의 획득 등등 여러 이유를 들어 바다로 진출해갔기에 이를 제국주의 시대라 우리가 부르고 있지만, 그 다양한 동기와 이유의 깊은 근저에는 그들이 오행상 금과 수의 사람들이기에 지니는 어쩔 수 없는 바다로 향한 열정이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고, 바로 앞서의 ‘롱쉽’이라는 영화가 그 심리와 동기를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본다.

이에 반해 중국은 앞서의 말처럼 거기에 좋은 물자와 자원이 있어도 마침내 그 사람들을 복속시켜 다루기가 어려우니, 공연히 대외 확장책을 쓰지 말라는 명 태조의 유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먼 바다 너머 저편에 대한 동경이나 열망이 없었던 것이니, 이는 중국이 토(土)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토는 그 의미가 종합이고 완성이기에 더 이상의 욕심을 자제하려는 면이 있다. 중국의 유교가 전하는 가르침 중에 물질적 욕망이나 탐닉을 경계하는 내용이 많은 것도 그런 배경이다. 그런 그들은 화약을 만들어도 불꽃놀이에 썼고, 나침반을 만들었지만 바다로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화약으로 마침내 아편 전쟁에서 청 제국을 무너뜨렸고, 나침반으로 전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았다. 이를 학자들은 문화의 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더 근원적인 이유를 들고 싶다.

중국은 토의 나라로서 불을 좋아하기에, 정신 문화와 극기복례, 즉 인(仁)을 이상으로 한다. 불은 오행 상 문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 그리고 특히 흐르는 물은 모습이 일정한 틀이 없기에 정형화(定型化)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저 먼 미지를 항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물의 특성을 ‘서구의 종말’을 쓴 슈펭글러는 자신의 책에서 파우스트 적인 혼(魂)이라고 이름짓고 있다.

중국은 토이고 유럽은 금이며, 영국과 미국은 물이다. 그리고 우리는 목(木)이다. 이제 물의 시대-미국에 의한 세계 제패-가 서서히 끝나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 역시 우리만의 정열과 장점이 있을 터인데, 그 것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미국의 시대가 가면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꽤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행의 순서는 목-화-토-금-수이기 때문에 다음은 목(木)의 시대가 열릴 순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대는 몇 백년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일 수 있기에 당대를 사는 우리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목의 시대가 오고 있음은 분명하다.

재미 삼아 몇 가지 에피소드를 달고자 한다.

중국 요리 중에는 제비집을 재료로 하는 진기한 음식이 있는데, 이는 정화의 남해 원정이 가져온 부산물이다. 요리에 쓰이는 제비집은 주된 산지가 태국이나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로서 이른바 남해 일대에서 난다. 정화가 원정을 다녀와서 황제에게 제비집을 바쳤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아울러 중국화교들이 동남아로 진출해 간 것도 정화의 남해 원정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정화의 원 성씨는 마(馬)씨였는데, 이는 그가 아랍계 출신(색목인)으로서 중국 운남성에 정착했던 사람들의 후손이다. 여기서 마씨를 쓴 이유는 무하마드(한 때 마호멧이라 불리던)교도이기에 그 앞소리를 딴 것이다. 그는 명이 운남을 점령하자 포로가 되었고, 살아남기 위해 거세를 받아 환관이 되었다가 용맹성을 인정받아 대장군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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