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켕겼던지 이미 심의절차가 끝났음에도 국사편찬위원회는 1인당 2시간으로 열람을 제한하는 등 고도의 보안조치를 취하는 전례 없는 행태를 보여주었다. 무슨 국가기밀사항도 아니건만 최고 권부와 극소수 정치인들에게만 책의 전모가 공개되었으며, 정작 당사자라 할 교사 교수 연구자들은 뒷전에 밀려나 귀동냥 눈동냥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왜 그렇게 오금 저려하며 파수꾼을 자임했는지는 며칠간의 단편적인 보도만으로도 넉넉하게 밝혀졌다. 자신들이 검정 통과시킨 바로 그 책이 태어나서는 안 될 '귀태' 교과서였기 때문이었다.
▲ 김성수 동상. ⓒ위키피디아 |
김성수 대목만 봐도 대대적인 역사 왜곡이 보인다
언론을 통해 빙산의 일각만이 드러났지만 뉴라이트 국사교과서의 역사변조는 극우학자의 치기 어린 일탈과 만용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위험해 보인다. 일본군'위안부' 등 일제침략상 왜곡, 식민지근대화론의 수용,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 미화, 민주화운동 경시, 4·3사건 등 국가폭력 은폐, 역대정권에 대한 편향적 기술 등등. 수위를 넘어도 한참 넘은 수준 이하의 저질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전혀 다르다고 극구 부인했던 이른바 뉴라이트 '대안교과서'의 내용과 지향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전방위에 걸친 친일문제 왜곡은 한층 노골적이다. 화신백화점 경성방직 등 대표적인 친일매판 기업을 민족자본으로 포장하는가 하면, 정부수립 후 이승만과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사실을 불가피했던 상황으로 호도했다.
일일이 거론할 것도 없이, 단 한 대목만으로 이 책이 얼마나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그리고 무책임한 창작인지 볼 수 있다.
"1940년 8월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시키자, ①사주인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광복 때까지 은거하였다. ②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고, ③일제가 주는 작위도 거절하였다. ④그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보고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⑤이승만이 하는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송진우, 장택상 등과 함께 비밀리에 청취하기도 하였다. ⑥학생들의 창씨 개명 거부와 학도병 징집 거부가 이어지자, 보성 전문학교장인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대로 행동하라며 창씨 개명 거부와 징집 회피 및 거부를 방관하였다. ⑦그러나 1943년 총독부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매일신보 사설란에 김성수 명의로 징병에 찬성하는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는 글이 실렸다. 물론 이 글은 매일신보의 김병규 기자가 명의를 도용하여 쓴 것이라고 하는데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⑧김성수는 1942년 이후 요시찰 인물 2등급으로 분류되어 감시와 내사를 당했고, ⑨보성 전문학교는 1944년 4월 '경성 척식 경제 전문학교'로 격하 당하였다. ⑩그리고 1944년 7월에는 강압에 의해 일본 총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⑪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여 항복하고 아베 총독이 치안권 이양을 송진우에게 제시하였으나, 송진우는 거부 의사를 알려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번호는 인용자) 교학사 교과서 292쪽, '김성수의 광복 직전 동향'에서
일제 말기 김성수의 행적을 서술한 이 문단은 최소한의 학자적 양심마저 저버린 기만과 왜곡으로 가득 차있다. 매국 문필로 세간을 들끓게 했던 김완섭의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방불케 하는 내용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러나 이 11개 서술의 허구성을 차례로 증명해보면 아래와 같다.
① 허무맹랑한 궤변이다. 해방 때까지 김성수가 고향에서 은거했다면 김성수의 경력과 행적은 모두 허구가 될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의 왕성한 활동을 알려주는 각종 보도와 문헌자료들이 전부 조작이 아니라면 은거설은 날조에 지나지 않는다. 수백 가지도 넘는 기록들을 무시한 근거 없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② 일제는 창씨 개명이 자발적임을 강조하고자 유력자의 조선명 유지를 묵인하면서 이를 "법령이 자유주의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 선전하였다. 이에 따라 거물 친일파 다수가 서민과 달리 '성을 갈 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선 귀족의 90%,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관(고문 부의장 찬의 참의) 역임자의 50% 이상이 창씨 개명을 하지 않았다.
③ 김성수가 작위를 거절하였다는 설명은 이들이 교과서를 쓰지 말아야 할 결정적 이유의 하나이다. 우선 그러한 사실 자체가 없었다. 조선 귀족은 일제가 1910년 강제병합 공로자 76명을 엄선해 작위를 주면서 창출되었다. 이 중 8명은 일제가 주는 작위와 은사금을 곧바로 거절하였다. 이후 35년 동안 추가 수작자는 1924년 남작 작위를 받은 이완용의 2남 이항구가 유일했다.
김성수와 친교가 있는 조선총독부 관료출신의 회고에서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제안을 사절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는 하나 이는 작위가 아니며 객관적 증거로 채택하기도 어렵다. 설령 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일제가 박춘금, 윤치호, 한상룡 등 10명의 특급 친일파만을 귀족원 의원으로 선정했음을 고려하면 제안받은 사실 자체만으로 일제의 신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조선 귀족과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분간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교과서를 집필해도 무방한지 염려스럽다.
④ 이 역시 객관적 사료로 입증할 수 없다. 1941년 태평양전쟁 개전 이후 일제에 대한 김성수의 협력은 오히려 노골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일제 말기 김성수의 친일 행각을 볼 때 그가 일제의 패망을 예견했다기보다 일제의 승리가 대세라고 보고 이에 순응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⑤ 이승만이 등장하는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청취했다는 사실이 교과서에 실릴만한 가치 있는 행위인지 의심스럽다. 일방적인 증언을 교과서에 수록한 점도 문제이지만 마치 조국독립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점은 그 저의를 의심하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⑥ 가장 비열한 거짓말이다. 실제 보성전문 학생들은 다른 학교 학생들보다 일제의 전시정책에 다소 비협조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김성수가 이를 방관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김성수는 각종 전시동원단체의 간부를 맡아 활동하면서 숱한 기고 연설 좌담 인터뷰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였다.
⑦ 한심하게도 우선 인용이 잘못되었다. 김병규 기자의 대필이라고 둘러대고 있는 글은 1943년 8월 5일의 '문약의 고질'이 아니라 11월 6일의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이며 둘 다 사설이 아닌 기고문이다. 최소한의 대조도 거치지 않은 불량 교과서라 해도 할 말이 없음 직하다. 명의도용설, 대필설, 조작설은 김성수의 친일 행위를 변호하려는 측근들이나 후대의 추종세력에 의해 시도 또는 유포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명도 몇 편에만 해당할 뿐 다수의 친일 기고문을 모두 해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더구나 복수의 신문에 실린 좌담이나 연설 등에 대해서는 그들의 억설도 속수무책의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다행인 것은 비호세력의 책임 전가나 억지주장들이 최신 연구들로 철저히 해부 되어 부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⑧ 일제는 1910년 이전부터 1945년 8월까지 한국인 중 일정 정도의 사회경력과 영향력을 지닌 인물들을 대상으로 '요시찰자'로 선정해 일상적으로 감시하였다. 그러나 요시찰자가 곧 항일인사라는 등식은 물론 성립하지 않는다. 1927년 무렵 경성복심법원검사국에서 작성 보관한 것으로 추정되는 '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총 300여 명의 '요시찰인'이 수록되어 있고 김성수도 여기에 들어있다. 그러나 이후 변절한 최린, 최남선, 황신덕, 여운홍 등 저명한 친일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일제의 사찰은 독립운동가와 불령선인은 물론 특급 친일파들까지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각종 정보보고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전공자들은 이를 기초상식으로 알고 있다.
⑨ 마치 보성전문이 김성수로 말미암아 탄압을 받고 격하된 듯이 묘사하고 있으나, 같은 시기 연희전문은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이화여전은 '이화여전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 양성과'로 바뀌는 등 일제의 전시 교육체제 재편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⑩ 강압에 의해 일본 총리에게 충성맹세를 하였다면 충성맹세를 하지 않은 대다수는 강압을 받지 않았다는 역설이 성립되어야 한다.
⑪ 아베 총독이 조선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도자에게 치안권 이양을 교섭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치안권 이양을 실행에 옮겼던 엔도 정무총감의 인터뷰 기록에는 송진우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송진우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교섭 대상도 아니었던 김성수가 동의한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궁금할 뿐이다. 전형적인 물타기이자 치안권을 인수한 여운형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밖에 읽히지 않는다.
김성수 친일 행위 입증하는 추가자료 존재
김성수의 광복 직전 동향에 대한 과도한 설명에는, 뉴라이트 교과서의 편향성과 비전문성 그리고 지적 수준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 직설하자면 전문에 걸쳐 신뢰할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오류이거나 추정이거나 확대해석이 아니면 자가발전과 견강부회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축적되어온 학계의 연구 성과를 무시하고 회고록이나 증언 등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들을 사료비판도 없이 전면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데 이르러서는 저자들이 역사학자로서 최소한의 양식이라도 갖추고 있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서술체계나 균형을 아예 무시하고 독립운동가도 아닌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행적을 이렇게 장황하게 나열하였으면 반드시 그 배경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는 친일문제를 희석하려는 저의가 짙게 깔렸다. 김성수는 대지주 출신의 동아일보의 사주이자 부통령을 역임한 거물로 보수의 아이콘이라 할 만하다. 또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와 함께 구세력을 옹위하는 요새가 아닌가. 친일의 원죄를 은폐하고 김성수를 지켜내는 일은 그들로서는 중차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교과서를 이렇게 거짓으로 도배하는 만행을 묵과할 수 있을 것인가.
김성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은 물론 국가기관인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최종결과보고서에도 이름을 올린, 틀림없는 친일파이다. 김성수의 학병지원 독려와 총독부 외곽단체 활동에 대해서는 사법부도 1심에서 이미 이를 인정하였으며, 사회문화단체에서 행한 친일활동도 현재 계류 중인 고등법원에서 그 여부가 곧 가려질 예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적 판단까지 내려진 김성수의 친일행위에 대한 일방적인 변명을 교과서에 수록한다는 자체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9월 4일 민족문제연구소는 뉴라이트의 역사날조에 정면 대응하여, 김성수의 부일협력 행적을 대폭 보강한 친일인명사전 개정판(미간행) 원고와 전거 그리고 그의 친일행적이 자발적 적극적이었음을 입증하는 명백한 사료를 추가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한 아래의 신문자료는 친일인명사전 초판본 발간 이후에 발굴한 것으로 향후 개정판 출간 때 반영할 예정이다. 민족지도자라는 김성수의 허명이 민망할 정도의 구체적인 친일행적이 담겨있어 충격을 던져준다.
보성전문학교장 김성수(金性洙) 씨는 16년 전부터 계동정(桂洞町)의 자택을 지키고 있던 철문(120貫) 3개를 탄환으로 만들어 나라를 지켜 달라고 1일 오후 해군무관부(海軍武官府)에 헌납, 아울러 마차 1대의 놋쇠와 동제(銅製) 식기류도 개인 자격으로 동시에 헌납하였다.
- <경성일보> '철문을 탄환으로, 놋쇠도 마차에 실어' 1943년 4월 2일(조간) 4면
▲ 1943년 4월 2일, <매일신보>에 실린 김성수의 철문 헌납 기사. ⓒ조세열 |
- <매일신보> '普專 金校長의 垂範' 1943년 4월 2일(조간) 3면
대동소이한 위 두 사료는 김성수의 친일이 결코 강요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또 당시 유일하게 남아있던 한글, 일어 신문에 함께 실린 사실로 볼 때 조작이라고 우길 여지도 없다. 요컨대 김성수는 자택의 철대문까지 떼어 군부대에 직접 헌납할 정도로 엽기적인 친일행각을 앞장서 벌였던 것이다.
김성수의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를 앞에 두고, '위험한 한국사 교과서'의 저자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의 역사서술은 과연 객관적인가. 교과서검정심의위원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도대체 무엇을 심의하였는가. 국사편찬위원회에 묻는다. 당신들은 왜 정권의 의중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노릇을 자임하는가. 결론은 하나다. 미래세대의 교육을 망치지 않기 위해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검정합격 결정은 즉각 취소되어야 한다. 빠를수록 좋을 일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