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오늘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가 도난 당한 것은 루브르를 위해서나 그림을 위해서나 불행이라기보다 행운이었다. 그림을 영영 찾지 못했거나 찾더라도 손상됐더라면 난리가 날 판이었으나 작품은 무사히 2년 반만에 되돌아왔다. 그동안 프랑스는 물론 유럽이 들썩거렸고 많은 경찰이 동원돼 항만이나 기차역을 수색하는 등 법석을 벌인 것이 손실이라면 손실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정도는 모나리자의 값이 뛰어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값이 얼마나 올랐단 말인가. 그건 말할 수 없다. ‘모나리자’는 그 전에도 후에도 경매 같은 데 나온 적이 없다. 그것은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이자 프랑스의 자존심 같은 것이어서 그 ‘시세’가 올라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도난 사건으로 ‘모나리자’는 그런 국가적 자존심에 걸 맞는 신화나 전설을 갖춘 셈이었다.
달리 말해 원래 다 빈치가 미완성 상태로 남겼던 모나리자는 그 사건을 통해 세계 미술품의 상징으로 완성된 셈이다. 2000년 이탈리아의 한 여론조사기관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을 물은 결과 모나리자가 85․8%로 2위인 반 고흐의 ‘해바라기’(3․6%)와 너무 큰 격차를 보인 것은 그런 모나리자의 신화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프랑스의 신화가 63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으로 나들이 가자 2개월 동안 160만이 몰려왔고 74년 도쿄 나들이에서는 사람이 너무 몰려 관람객은 1․9초 동안 그 ‘은은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 미소도 도난 사건으로 더 은은하고 신비하게 된 셈이다.
다 빈치가 500년 전인 1503년부터 3년 간에 걸쳐 그리다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모나리자’는 원래부터 신비에 쌓인 그림이었다. 우선 그 주인공을 둘러싸고 수많은 논쟁이 오간 것이 그렇다. 지금까지 그 주인공은 피렌체의 부호 프란체스코 조콘다의 부인 엘리자베타고 ‘모나리자’도 ‘엘리자베타 부인’이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으나 막상 다 빈치는 그런 이름을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그것이 바로 다 빈치 자신을 그린 것이라고도 하고 사생아로 다 빈치를 낳은 그의 어머니여서 자조적인 미소를 띠고 있다고도 했다. 여기에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그 미소가 쥐를 싫건 잡아먹은 고양이가 짓는 포만의 미소라고 악담 같은 말을 했으나 그럴 때마다 모나리자의 값은 치솟기만 했다. 그것은 반예술을 주장하기도 했던 초현실주의 작가 마르셀 뒤샹이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모나리자를 둘러싼 세계의 호들갑이 진정한 예술적 가치 때문인지 아니면 센세이션의 산물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그런 신화나 센세이션을 만드는 것도 국가의 역량일 수 있다. 일찍이 이탈리아 화가 다 빈치가 그린 이 그림을 4000 에큐에 사들여 프랑스 그림으로 만든 프랑스와 1세부터 그렇다. 그리고 유럽 문화의 중심지인 파리의 시인 묵객들을 통해 모나리자는 더 이름을 떨친 것이다.
모나리자가 도난 당하자 혐의를 뒤집어쓰고 일주일이나 감옥에 갇힌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도 그렇다. 이탈리아 출신의 사생아였던 그는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라는 시 ‘미라보 다리’로 어느 프랑스인 못지 않게 세느강을 유명하게 했으나 그 한해 전에는 같은 이탈리아의 사생아 출신 화가의 신화에 들러리를 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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