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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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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11>

자살(自殺)하는 사람들

금년 들어 자살이라는 어휘가 수시로 들려오더니 얼마 전에는 정몽헌 회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일마저 발생했다. 군 복무 중인 사병이 자살하고, 사업에 실패해서 온 가족을 데리고 집단 자살-이는 사실 타살이다-하고, 카드 빚에 쪼들려 자살하고, 어린 중학생이 학업 부진으로 괴로워하다가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 자살하고 등등, 갖은 이유와 방법으로 자살이 끊이질 않는다.

이제 자살은 일상사가 돼버린 셈이다.

불과 몇 달 전에 우리나라에서 하루 평균 19명이 자살한다는 보도를 접하고 놀란 적이 있는데, 얼마 전에는 하루 평균 36명이 자살하고 있으며, OECD 국가 중 자살률 3위라고 하니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특히 실업자, 신용불량자가 늘면서 생활고, 사업실패에 따른 자살이 늘고 있다 한다. 특히 40, 50대의 남성 사망률에서는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하니 우리에게는 분명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몇 달 전에는 이혼율 세계 3위라고 해서 놀란 적도 있었지만, 왜 이처럼 좋지 못한 부문에서 우리가 초 선진 대열에 합류했을까 생각하면 정말 기가 막히고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왜 정부는 우선적으로 자살과의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원망도 생긴다.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는 스위스라고 하는데, 그 점은 제법 이해가 간다. 원래 자살률은 기후가 한습한 지방에서 높기 때문이다. 한습한 기후는 우울증과 깊은 관련이 있고, 거기에 그 사회의 성숙도가 높으면 성취동기가 약해지기 때문에 자살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후도 더운 편에 속하고 대도시의 경우 여름에는 거의 아열대 기후에 속하며 일조량도 많은 나라이건만 왜 이토록 자살률이 높은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최대경쟁사회(Maximum Competition Society)라는 점이고, 둘째는 그에 반해 사회 안전망은 그만큼 빈약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IMF사태 이후, 고용이 대부분 계약직으로 전환되면서 우리의 삶은 그만큼 불안해졌고 신경질적으로 날카로워졌다. 특히 40대 후반의 사람들, 이들은 주로 가장이며 생계를 맡고 있는 사람들인데, ‘사오정’, ‘오륙도’라는 말까지 유행할 정도로 이들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필자는 그간 상담을 하면서 자살로 생을 마친 사람들의 사주를 상당 수 보고 느낀 바 있다. 죽은 사람이 찾아온 일은 물론 없었고, 주로 망자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필자를 찾아와 상담 중에 ‘동생인데, 어떤 일이 있었겠느냐’고 물어보는 경우도 있고, 더러는 ‘이 사람은 자살로 죽은 형인데 과연 그런 운이었는지’를 문의하다보니 필자가 경험한 경우들이다.

하지만 필자는 과연 그 사람이 죽어야 했을 운인지에 대해서는 결코 자신이 없다. 그저 당시 그 사람이 대단히 곤경에 처해있거나 우울증이 심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지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경우를 예측할 능력은 없다.

이번 정몽헌 회장의 경우도 그렇다. 인터넷을 뒤져 생년월일시를 알아보니, 올해 6월부터 7월에 운세가 대단히 힘들고 곤경에 처할 운세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지만, 정작 그 날 그 시각에 건물에서 투신까지 하리라고는 결코 내다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한 사람들의 사주를 볼 때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자신을 옥죄어오는 힘겨운 환경을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 다시 말해 적극적인 방어본능이 자살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만 대부분 그것은 생각으로만 그치게 된다. 이는 자살이란 행위가 대단히 이율배반적이기 때문이다. 자살로서 현재 자신을 둘러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방어본능이 자살 충동이지만,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을 당시의 고통에 대한 공포도 있어 그 충동을 억제하고 있다. 따라서 자살하기 위해서는 그런 공포들을 떨칠 수 있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면 정몽헌 회장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년 戊子
월 辛酉
일 壬寅
시 --

이 분이 투신자살을 감행한 시각은 다음과 같다.

년 癸未
월 己未
일 己酉
시 乙丑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사주를 볼 때 내성적인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분이 대북 송금 수사가 본격화된 지난 6월 무오월부터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기미월이 되어 계미년의 계수를 심하게 누르니 모든 의지가 박약해졌던 것이다.

그러던 중 자살 전날인 8월 3일 무신(戊申)일에 상당한 심적 압박을 받았던 모양이며, 특히 지지(地支)에 있는 신금(申金)이 임인(壬寅)인 본인 사주의 일지에 있는 인목(寅木)을 꺾어 놓은 것이 자살충동을 불러일으킨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살 마음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특히 무신일 중에서도 오후 3시 반부터 시작되는 경신(庚申)시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전의상실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이 힘든 현실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충동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 날 저녁 9시 반인 계해 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이를 억누르고 있다가 늦은 밤인 11시 30분, 갑자시부터 용기가 나기 시작했을 것이고, 정말 실행에 옮긴 시각은 다음 날 새벽인 을축시였을 것이 분명하다. 을축시가 되니 임인일에 태어난 정몽헌 회장으로서는 충동적인 용기가 솟아났고 그것이 그런 끔찍한 행동을 낳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후적인 해석이며, 만일 사전이라면 필자는 이렇게 예측했을 것이다. ‘이 분이 이 시각에 가면 성질이 몹시 나서 잠도 못 자고 기물을 부셔버리는 거친 행동이나 발작이 있을 수 있네요’ 라고 말이다.

그 시각이 자신을 둘러싼 거친 환경에 대해 항거하는 시각인 것은 틀림없지만, 자살로 이어지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임(壬)의 날에 태어난 정 회장이 을축시에 용기를 낸다는 것은 사실 자기 방어 본능인데, 그것이 자살이라는 역설을 낳고 있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공포나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정신활동이다. 위기상황에서 사전에 훈련받지 않은 자가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미친 사람이다. 그렇건만 그 공포를 무릅쓰고 자신의 생명을 끊어버리게 만드는 동기가 바로 적극적인 방어본능이라니 정말이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정회장의 죽음을 생각하면 실로 가슴 저리고, 얼마나 탈출구가 없다 싶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에 불쌍하다는 마음을 지금도 금할 수가 없다.

필자가 상담했던 어떤 분은 자살하기 위해 수면제를 무려 1백50알이나 먹었는데, 졸리기 시작하자 이 때 잠들면 진짜로 죽는다는 생각에 그만 겁이 질려 밤을 꼬빡 새운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그 분은 다시는 자살 충동을 느껴본 적이 없노라고 했다. 이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심리이다. 이에 대해 필자는 정말 잘했노라고 마구 칭찬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또 어떤 분은 40세 초반에 살 길이 막막해서 바다에 투신한 적이 있었는데 뜻밖으로 해양경비원에게 구조되어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그 분은 열심히 일하고 행운도 따라주어서 지금은 서울 모처에서 커다란 공구 도매상을 경영하면서 유복한 삶을 누리고 계시다. 당시의 심정을 자세히 물어보는 필자에게 그저 ‘제가 그 때 너무 어려운 나머지 미쳐 있었지요’라는 말만을 들려주시는 것이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자살 충동을 심각하게 느끼는 분이 있다면 반드시 해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다.

삶이란 살다보면 정말 막다른 골목이다 싶을 때가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지레 더 이상 출구가 없다 여기고 기가 죽거나 의욕을 상실하지 말고 끝까지 뚜벅뚜벅, 무거운 발걸음일지언정 걸어가 보라는 것이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 다다르면 반드시 또 다른 소로길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지능이 발달한 동물이라 미리 예측하고 판단하는 존재이지만, 인생의 많은 것들이 그리고 좋고 멋진 일들이 우리가 알지도 예측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저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제 정말 끝이다 싶더라도 밑지는 셈치고 그 끝이다 싶은 곳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라는 얘기다. 행운은 언제나 그런 곳에서 미소지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좋아하는 ‘송학사’라는 노래의 앞부분을 옮겨본다.

‘산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무얼 그리 갈래갈래 깊은 산 속 헤맸냐’

정말이다, 산모퉁이만 돌아서면 그리도 찾아 헤매던 송학사가 있는데, 모퉁이 돌아가기 직전에 가서 송학사는 없다 라고 단정짓지는 말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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