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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대안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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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대안을 찾아서

대안학교의 길<10> '겸손을 가장한 오만'

영화 <세기말>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남자가 식당에서 우연히 평론가를 만난다. 기자들에 둘러싸인 그 평론가는 요즘 한국영화를 비판하고 있다. 영화에 대해 별점을 매기며 평가하는 그는 근래의 영화들이 주제도, 철학도 없다는 말을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자, 말없이 듣고 있던 이 남자 이렇게 말한다. "이봐, 자네는 당신 아내한테도 별점을 주나 아내의 머리카락은 별 세 개, 얼굴은 별 두 개, 이렇게. 그러지마, 사랑하는 상대라면 신중해야지…."

그간 도시형 대안학교라는 새로운 실험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우리들이 스스로에게 '나는 사랑하는 상대에게 어떠한가?'라고 묻고 그 답을 찾아야 하는 때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소통하지 못하다**

작년에 나는 중학교 2학년 학년팀장을 맡았다. 이우학교는 학년 팀 체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학년팀장의 책임과 권리는 그 학년에서는 교장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가슴에 돌덩이를 매달아 놓은 듯 하루하루의 생활이 살얼음판이었고 학년의 학부모와 아이들, 학년 교사들, 교육과정을 챙기는 일에서부터 학교 전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처리(?)해 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일의 많고 적음보다는 나의 부덕함과 무능력, 좁은 시야와 성급한 판단이 일을 더욱 힘들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조차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시시각각 벌어지고 있었으나 그것을 함께 있었던 교사들과 잘 나누지 못했다. 문제 상황을 공동의 지혜로 풀어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다. 마음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다.

급기야 2학기에 학년 선생님들이 이야기자리를 마련했다. 그동안 그분들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고 우리의 대화가 늘 겉돌고 있었으며 제대로 소통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놓는 선생님들 앞에서 나는 여전히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속으로는 '왜 그렇게 야단을 떠는지…. 당신들은 얼마나 아프게 소통하려고 노력했느냐'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름대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잘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오만함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도 그 일이 있은 한참 후에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일을 계획하고 던져주는 사람이며 그분들은 그것을 해결해 가는 사람이라는 이분법에 사로잡혀 결국엔 동료를 의심하고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 사람은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저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라고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의심하고 의심함으로 인해 또 괴로워했다. 문제를 함께 풀고 일을 함께 도모해 가려는 노력보다는 나만의 아집에 빠져 지냈던 것이다.

이 경험은 내게 꽤 깊은 내상을 남기기도 했지만 대안적 가치와 철학을 말하고 지켜내는 것 못지않게 그것이 일상에서 구현되는 방식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을 하게 했다.

***소통은 결코 공감 없는 언어로 오지 않는다**

이우학교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말 중에 하나는 <소통>이다. 소통에 대한 갈망들이 크다는 것은 소통이 잘 되지 않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욱 깊고 넓은 소통을 하고 싶다는 우리들의 소망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우리의 판단과 해석은 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오히려 이런 다양한 생각들이 상황을 더욱 풍부하고 섬세하게 들여다보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이야기하고 나누는 방식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표자회의(학년팀장, 교무, 행정실장, 교감, 교장 등으로 구성된 회의체)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한창 이야기가 진행 중이다. 가만히 들어보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데 목소리가 높아지고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는 듯 자못 심각하다. 이우학교에서의 대화란 여전히 고압적이거나 자기 시각을 강변하는 경우가 많다.

토론과 논쟁은 상황을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찾는 데 유용한 도구다. 그러나 이것이 공감과 경청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지적과 비판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감정과 선입견은 상황을 희미하고 복잡하게 만들어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게 한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사람이 어떤 맥락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려 하고 공감하려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애정 어린 비판은 있을 수 있고 그것은 때로 서로를 성장하게 하고 각자의 시야를 폭넓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어코 그를 주저앉혀 절망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으로 그의 성장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소리는 높아지고 분위기는 일순간 싸늘해지며 듣는 이는 마음을 다치게 된다. 일상의 결들마다 진정한 소통의 숨결을 불어넣으려 애써봤으면 좋겠다. 사랑한다면 좀 더 신중해야 한다.

***엎드려 보자**

'겸손을 가장한 오만함.' 어떤 선생님이 지금 우리를 일컬어 하신 말씀이다. 맞다. 어떤 순간 벼락처럼 들리는 이 말은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게 낮아져야 하는지, 아이들과 학부모와 교사들과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서도 얼마나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을 낮추어야 하는지 깊이 성찰하게 한다.

얼마 전, 수업시간에 일제히 우는 풀벌레 소리 때문에 잠시 수업을 접고 아무 말 없이 아이들과 그 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다. 선생님의 뜬금없는 제안에 아이들은 피식 웃고 말았지만 그래도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들어 보려는 속 깊고 눈 맑은 아이들이었다. 그 순간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아이들과 나는 수업이 끝난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시간은 우리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비밀을 하나씩 가지게 해주었다.

마음의 행간과 영혼의 맥락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한 없이 낮아지는 서로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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