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단체의 반격**
1996년 시화호사건이 터지자 언론들은 새만금을 주목했다. 시화호를 보니 새만금도 썩을 것 같았다. 전북환경운동연합은 1996년 12월 17일 ‘새만금 수질오염 우려’를 7대 환경뉴스로 선정했다.
1997년 8월 21일 건국대 지리학과 이현영, 이승호 교수는 ‘한국의 간척사업이 주변의 환경변화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서해안 대규모 간척지 부근 지역에서 기온, 온도, 안개일수 등 기후지표가 변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국회 환경노동위 이미경 의원은 9월 30일 “새만금호가 제2의 시화호가 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씨가 새만금사업을 밀어 붙인 공로자라는 이야기는 내가 이미 앞에서 했다. 김대중씨는 1997년 11월 19일에도 “새만금 지역을 아시아 태평양 환 황해권의 생산ㆍ교역ㆍ물류 전진기지로 개발하겠다”고 공약했다. 대통령선거를 한 달 앞 둔 시점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당선한 뒤 1998년 1월 10일, 일이 반대로 돌아갔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간사회의는 경부고속철도, 시화호, 새만금간척사업을 김영삼 정권 3대 부실사업으로 규정하고 사업계획 수립 및 진행과정에 대해 전면 재조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환경단체가 반격을 시작했다. 녹색연합은 1998년 2월 2일 ‘세계 습지의 날’을 맞아 새만금지구 등 각종 간척 및 매립 중단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환경운동연합 전국 36개 지역 사무국장단은 3월 6일 전북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새만금사업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해양수산부는 3월 26일 ‘우리나라의 갯벌’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1987년 이후 사라진 갯벌이 8백10.5㎢이며 전체 갯벌 면적의 29%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감사원은 4월 2일 대형 국책사업 주요 감사대상사업 16개를 확정했다. 첫째가 새만금사업이었다. 현장특별감사에 돌입한 것이 4월 27일, 감사결과를 발표한 것이 9월 24일이다.
이 감사 보고서를 읽어보면 참 기가 막힐 뿐이다. 이건 노골적으로 욕만 안 했다 뿐이지, “이거 완전 개판이다. 다 때려 치워라!”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특히 “1991년 시공할 때 총 사업비를 1조3천억원으로 산정했으나, 2011년 완공한다고 볼 때 농업용지로 개발 시 5조9천5백30억원, 복합산업단지로 개발 시 28조5천5백29억원이 필요하다”고 지적, 전국적인 새만금사업 반대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새만금사업 반대를 외치는 환경단체 목소리가 계속 터져 나왔다. 1998년 10월 24일에는 ‘새만금간척사업 백지화를 위한 시민위원회 1천명 선언문’도 나왔다.
농업기반공사도 맞서 싸웠다. 12월 11일 ‘새만금호 수질예측 및 대책보고서’를 환경부에 제출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2003년 방조제 물막이 시점 수질과 2011년 내부개발 완료시점 수질이 농업용수로 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1999년이 되었다. 유종근 전북도지사는 1월 11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새만금사업 전면재검토를 선언했다. 그리고 민․관․학이 참여하는 ‘새만금사업 민관공동조사단’ 구성을 제의했다. 물론 새만금사업을 포기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김성훈 농림부장관은 1월 12일 공동조사단 구성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녹색연합은 같은 날 1월 12일 기자회견을 갖고, “새만금사업 재검토를 환영하지만 농어촌진흥공사는 수질보고서를 조작했다”며 “새만금사업 백지화 투쟁에 돌입한다”고 선언했다.
또 환경부 곽결호 수질보전국장은 1월 29일 국회 환경포럼에 참석, 새만금 담수호를 농업용수 수질로 개선시키기 어렵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새만금사업 민관공동조사단은 1999년 5월 1일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이 조사단은 해양생태ㆍ수질보전ㆍ경제성 3개 분야로 나눠 연구를 진행하기로 했으며, 2000년 4월까지 보고서를 완성하기로 했다.
환경ㆍ시민ㆍ종교단체와 농림부ㆍ농업기반공사ㆍ전라북도의 싸움은 2000년과 2001년 가장 치열했다.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새만금사업을 왜 하면 안 되는지 조목조목 따져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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