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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재앙

박근형의 새만금 리포트 <7>

***대재앙**

건설업체 관계자들은 박수쳤다. 물은 여전히 푸른빛이었고, 이제 이곳은 인구 14만명과 공장 1천6백개가 들어서는 공업도시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문제가 생긴 것은 2년이 흐른 1996년 5월. 이것은 호수가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석유덩어리를 담은 천연 그릇 같았다. 1996년 6월 COD(화학적산소요구량)는 20.3ppm이었고, 최악이었던 1997년 3월 COD는 26ppm이었다. 환경단체의 현지조사 결과는 무려 35ppm이었다.

35ppm이라고 하니까 어느 정도로 나쁜 물인지 실감이 안 날 것이다. 수질은 보통 1등급부터 4등급까지 내려간다. 가장 깨끗한 물이 1등급이다. ‘쉬리’라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적이 있었는데, 이 쉬리가 1등급에서만 살 수 있는 우리나라 토종 물고기다. 2등급은 1등급만큼 깨끗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깨끗하다고 볼 수 있다.

수질이 점점 내려가 4등급이면 농업용수로 쓸 수 있는 기준이다.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농업용수는 결코 깨끗하지 않으며 시궁창 물이라는 것이다. 원래 시궁창 물에 부유물질이 많아 농업하기에 좋다. 농민 입장에서는 1등급 물보다 4등급 물이 농사에 더 좋다는 것이다.

이 4등급 농업용수 COD기준이 8ppm이다. COD 1ppm이란 무엇인가. 물 1리터(ℓ)당 화학적으로 필요한 산소량이 1㎎이라는 뜻이다. 즉 산소량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 만큼 물이 더럽다는 뜻이고, 시궁창 물이어서 농업용수로나 쓸 수 있는 4등급 기준이 COD 8ppm이다. 이 수치마저 넘어서면 그것은 너무 더러워서 농업용수로도 쓸 수 없으며 사람이 어떤 용도로도 쓸 수 없는 물이다. 이것을 유식한 말로 ‘등급외 수질’이라 한다.

그런데 35ppm이라 하면, 이것은 시궁창 물보다 4배 이상 더럽다는 이야기다. 이게 물인가? 내가 강창현 농업기반공사 환경연구실 책임연구원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수질에 대해 자신만만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시화호 재앙은 왜 막지 못했습니까?”

그 사람 대답이 이러했다.

“1995년 이전에는 농업기반공사 직원들이 우리 환경연구실 책임연구원들의 수질문제 제기를 귀담아 듣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시화호 사태를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 사건 때문에 우리 환경연구실 입지가 농업기반공사 안에서 높아졌어요.”

시화호의 실패는 계획단계에서부터 예견된 바였다. 이 사업은 1988년 9월 환경영향평가 협의 당시 담수화 전까지 인근 하수처리장의 방류수를 바다로 보낸다는 조건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정욱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저 물 분명히 썩는다. 하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다. 환경기초시설도 없었다. 1994년 1월 방조제공사를 완료하자 반월공단 폐수가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TV에 나온 시화호는 온 국민을 경악시켰다. 이제 시화호를 치료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바닷물과 섞는 것이었다. 바닷물과 섞으면 그것은 바닷물이지 담수가 아니다. 농사도 지을 수 없고 공업용수로도 쓸 수 없는 물이다. 즉 시화호를 바닷물과 섞는 것은 “이 사업 실패했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환경단체는 이를 반대했다. 수문을 열어 바닷물을 유통시키면 죽음의 물이 바다로 빠져나간다. 이는 어장도 다 죽일 것이다.

환경운동연합은 시화호에서 보트를 타고 수문을 열지 말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수자원공사는 1996년 6월 29일과 30일 이틀에 걸쳐 시화호 썩은 물을 배수갑문을 통해 바다로 빼냈다. 1996년 10월 국회 농림해양수산위 김종배 의원(국민회의)은 수자원공사와 농어촌진흥공사가 시화호 주민들의 눈을 피해 배수갑문을 조작, 1백67회에 걸쳐 해수 5억7천만톤을 유입하고 2백88회에 걸쳐 시화호 물 11억톤 이상을 방류했다고 주장했다.

시골에 어느 중학교가 있었다. 그곳은 시골이었고, 학생수도 적었다. 폐교되기 직전이었고, 남녀 학생 합쳐 한 반 밖에 없었다. 그 교실은 매우 평화로웠다. 선생님도 그런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교실의 평화는 자율적인 것이 아닌 타율적인 것이었다.

주먹은 서교활이었다. 나머지 남학생 29명과 여학생 30명은 그 학생에게 함부로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심심하면 남학생들을 야산으로 끌고 가 두들겨 팼다. 다른 남학생들은 언제 자기가 맞을지 몰라 하루하루 가슴을 조이며 살았고 돈만 생기면 즉시 바쳤다. 여학생들은 더 괴로웠다. 서교활은 일주일에 한 번씩 여학생 한 명을 물레방아간으로 데려가 겁탈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 학생 59명은 다른 지역 중학생들도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 학교는 너무나 평화로웠기에 서교활을 동경하는 학생도 있었다. 마치 서교활이 사라지면 이 학교 평화가 깨질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교활은 자기가 마음에 들어 하는 여학생을 또다시 물레방아간으로 끌고 가 겁탈하고 칼로 온 몸을 난자했다. 그는 여학생을 동굴 깊숙이 던졌다.

다음날 오전, 학교는 평화로웠다. 선생님은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났다. 그 여학생이 온 몸이 피범벅과 흙투성이인 채 교실로 걸어왔다. 그리고 선생님 앞에서 웃옷을 벗어 보이며 모든 사실을 고발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이렇게 대답했다.

“서교활은 혐의 없는 걸!”

환경운동연합은 1996년 6월 시화호 재앙을 초래한 책임자를 검찰에 고발했다. 당시 피고발인은 다음과 같다.

1. 정종택(당시 환경부장관)
2. 윤서성(당시 환경부차관, 전 환경부 수질보전국장)
3. 심재곤(전 환경부 수질보전국장)
4. 이윤식(전 한국수자원공사 사장)
5. 이태형(전 한국수자원공사 사장)
6. 조익태(전 농어촌진흥공사 사장)
7. 최중근(당시 전 한국수자원공사 관리본부장, 전 특수지역 사업본부장)
8. 남정길(당시 한국수자원공사 특수지역사업본부장)
9. 권태웅(전 농어촌진흥공사 시화사업단장)
10. 손종관(당시 농어촌진흥공사 시화사업단장)
11. 이범섭(당시 농림수산부 농어촌개발국장)
12. 이상무(당시 농림수산부 기획관리실장)

그러나 1998년 1월 수원지방검찰청은 시화호 관련 책임자들에게 “혐의 없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환경운동연합은 1998년 2월 항고했으나, 1998년 5월 서울고등검찰청은 항고를 기각했다. 그리하여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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