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호의 경고**
우리나라 환경단체는 1995년까지 힘이 약했다. 환경단체 사람들이 이 말에 항의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시화호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새만금사업 반대운동도 없었을 것이다. 인민들이 정부의 선전에 마취되어 ‘그래 간척은 좋은 것이야’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새만금사업 반대운동 해봐야 힘만 빠질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화호 사건은 너무나 끔찍했다. 죽음의 호수 시화호. 그 시커먼 물이 간척 담수호를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 끼친다. 그제야 사람들은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간척이 좋은 것이라고? 뭔가 이상한데!’
이에 대해 녹색연합 김제남 사무처장은 2001년 12월 약간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내 딸이 6살인데, 내 딸과 새만금간척 반대운동 역사가 궤를 같이 해요. 내가 임신했던 1995년 새만금을 처음 갔어요. 이 광활한 갯벌이 간척으로 모두 없어진다는 말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먹었어요. 그 때 우리는 습지보전세미나를 할 때였죠. 당시 그 일은 모든 사람이 포기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이 무한한 생명을 모른 채 넘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출산 때문에 1년간 활동을 유예했는데, 여전히 아무도 이 사안을 다루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시작하자고 그랬죠. 시화호 문제도 새만금간척 반대운동의 계기가 되긴 했지만, 시화호 문제가 터졌을 때도 새만금은 아무도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김제남 사무처장이 말한 습지보전세미나는 1995년 5월 30일 환경부가 주최한 ‘습지보전 및 현명한 이용을 위한 세미나’를 가리킨다. 이 자리에서 부산수산대 유동운 교수는 “새만금 등 대규모 간척사업이 벌어지고 있는 서해안 5개 지역 수협의 위판실적을 조사한 결과 어획고가 급감하고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부안수협 연체류 어획고가 1988년 3천5백톤에서 1994년 2백톤으로 격감했고, 갯지렁이가 거의 사라졌으며, 새우나 굴, 동죽 등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간척을 하면 갯벌생물이 죽는다. 갯벌생물이 죽으면 이를 먹고사는 물고기들이 죽는다. 오폐수를 정화하던 갯벌이 없어지는 만큼 바다는 더러워지고 그만큼 물고기가 줄어든다. 즉, 갯벌이 사라지면 먹이사슬 기초공급자들이 사라지면서 수산생물 생태계가 파괴된다.
우리는 너무나 평범한 진리를 모르고 있다. 방조제를 쌓으면 물이 고인다. 고인 물은 썩는다. 갯벌 중에서도 하천이 흘러드는 곳에 생긴 갯벌을 ‘하구갯벌’이라 한다. 이곳은 강 생태계와 바다생태계가 만나는 곳이다. 따라서 생물다양성이 풍부하다. 그런데 이곳을 막으면 강에서 바다로 흘러나가던 토사가 방조제 안에 쌓인다. 이는 갯벌생물들에게 엄청난 천재지변이다. 물은 계속 썩고 갯벌생물들은 더 이상 살 수 없어 죽어버린다. 이 시체가 썩은 채 담수호 밑에 가라앉아 점점 산소를 잡아먹는다. 이런 과정이 오랜 시간 이어지면서 물은 더욱 썩는다. 여기에 생활하수나 축산폐수 또는 공업용수가 흘러들어와 사태는 겉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것이 간척사업의 근본 문제점이며, 시화호가 이런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시화호사업을 처음 계획한 것은 1975년 농촌진흥공사였다. 농촌진흥공사는 농어촌진흥공사의 전신이며, 2000년 1월 1일 농업기반공사로 바뀌었다. 1985년 10월부터 1986년 4월까지 시화지구 개발 타당성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용역을 했고, 산업기지개발공사가 1986년 9월 27일부터 사업을 맡았다. 산업기지개발공사는 한국수자원공사의 전신이다.
이 사업의 개요는 이렇다. 경기도 안산시, 시흥시, 화성군, 옹진군에 걸쳐 있는 갯벌 1만7천3백㏊(5천2백만평)를 간척한다. 시화호라는 이름도 시흥시와 화성군의 앞 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총 연장 12.7㎞의 방조제를 쌓으면 담수호가 생긴다. 이것이 시화호다. 간척지 토지이용계획은 공업단지 1천3백2㏊, 도시개발 4천30㏊, 농지조성 4천9백90㏊, 시화호 6천1백㏊, 기타 8백78㏊. 공업도시로 개발하되 시화호를 이용해 농사도 짓는 것이 수자원공사가 내세운 사업목적이었다. 그러나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진짜 목적은 ‘70년대 중동에 진출한 건설업체들이 철수하면서 생긴 막대한 장비와 인력을 놀릴 수 없어서’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00년간 이어진 전국시대를 평정하자 골칫거리가 생겼다. 농민과 상인과 학자 등 인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내들이 이른바 무사였다. 하지만 전쟁은 끝났고, 사무라이들이 놀고 있었다. 이들을 그냥 놔두면 좀이 쑤시는 사무라이들이 언제 힘을 모아 자신에게 대항할지 알 수 없었다. 따라서 더 이상 전쟁을 멈출 수 없었다. 큰 건 하나가 필요했다. 어차피 이기든 지든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지더라도 수많은 사무라이들이 전쟁터에서 죽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에 명분을 내세웠다.
“명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 달라.”
조총이라는 막강한 무기도 있었으므로 재수 좋으면 조선을 치고 명나라를 삼킨 뒤 인도까지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감행했다.
시화호사업 첫 삽을 뜬 것은 1987년 4월 29일이었고, 방조제공사를 끝낸 것이 1994년 1월 24일이었다. 그간 4천9백50억원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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