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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카냥의 비극’ 씻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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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카냥의 비극’ 씻어버리자

<프레시안 스포츠> 브라질, 2014년 월드컵 개최 확정

월드컵을 다섯 번이나 제패했던 브라질이 1950년 월드컵 개최이후 처음으로 자국에서 월드컵 대회를 유치하게 됐다. 남미축구연맹 이사회는 17일(현지시간) FIFA의 대륙순환 개최방침에 따라 남미 대륙에서 열리게 되는 2014년 월드컵 개최지로 브라질을 결정했다고 발표해 벌써부터 축구에 죽고 사는 브라질 국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사진> 리우 카니발에 등장한 축구선수 호나우두 인형

***‘내가 봤던 아버지의 가장 슬픈 모습’**

축구 황제 펠레는 인터뷰를 통해 “내가 보았던 아버지의 가장 슬픈 모습은 1950년 월드컵 결승에서 브라질이 우루과이에게 패배했을 때였다”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1950년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브라질 국민들이 왜 그렇게 실망을 했는 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브라질에서 ‘제2의 종교’나 다름없는 축구의 인기와 1950년 월드컵을 앞두고 1만여명의 노동자를 투입해 마라카냥(Maracanã)경기장을 지어 브라질 국민들에게 최고의 축제를 만들어 주려 했던 정부의 지원을 생각한다면 그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마라카냥 경기장의 건립과 함께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브라질은 리우 카니발에서 ‘월드컵 퍼레이드’를 실시하고 우체국에서는 월드컵 기념우표를 찍어내는 등 온통 축구에 대한 것들 뿐이었다. 더욱이 한때 브라질 국가보다 유명하다고 했던 ‘브라질 팀 행진곡’에는 ‘브라질인들의 믿음으로 승리를 축하하자. 브라질의 챔피언 등극을 축하하자’라는 가사가 있을 정도였다.

월드컵이 시작된 후에도 브라질에게는 걸림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브라질 선수들의 지나친 자신감은 자만심으로 발전해 '마라카냥의 비극’의 전조가 됐다.

우루과이와의 결승리그 한 경기를 남겨 놓고 브라질의 언론은 호들갑을 떨었다. 상파울루의 <가제타 에스포르티바>는 경기 전날 ‘내일 우리는 우루과이를 이길 것이다’라는 헤드라인으로 기사를 실었고 리우의 <오 문두>는 브라질 축구선수들의 사진과 함께 ‘이 사람들이 세계 챔피언이다’라는 보도를 했을 정도였다.

또한 브라질 선수들은 우루과이와의 경기 당일 컨디션 조절은 하지 않고 오전 내내 외부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사인을 해 주느라 시간을 다 허비하는 결정적 실수를 범했다.

***‘마라카냥의 비극’**

브라질의 상대인 우루과이는 1924,28년 올림픽을 제패하고 자국에서 열린 30년 월드컵에도 우승을 차지한 전통의 강호였다. 우루과이는 신령스러운 힘을 갖고 있는 유니폼에 의해 보호를 받았던 뛰어난 수비수들로 정평이 나있었다.

하늘색 유니폼 상의를 입고 있던 우루과이의 별명은 ‘첼레스테(Celeste)’로 ‘신성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루과이는 플레이메이커이자 주장인 오브둘리오 바렐라를 축으로 압도적 우세가 예상되는 브라질을 만나게 되었다.

우루과이와 브라질은 전반전에 득점 없이 비겼지만 두 팀의 신경전으로 사건이 하나 터졌다.우루과이의 주장 오브둘리오 바렐라가 브라질의 수비수 비고데를 주먹으로 가격한 것이다. 오브둘리오의 주먹 한 방은 브라질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에 힘이 빠졌던 우루과이 선수들을 단결시키기에 충분했다.

1대1 상황이었던 후반 34분 우루과이의 지지아는 비고데를 드리블로 제치고 가까운 쪽 포스트를 향해 강슛을 날려 골을 성공시켰다. 우루과이의 결승골이 터지자 마라카냥 구장은 마치 영화 <흑인 오르페>에 나왔던 카니발이 끝난 뒤의 새벽풍경처럼 싸늘한 적막감만이 맴돌았다.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려던 브라질 국민들은 눈물을 흘려야 했고 브라질의 패배주의가 또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브라질 패배의 원흉으로는 골키퍼 바르보사, 수비수 비고데, 주베나우 등이 거론되었다. 브라질 언론은 이들이 모두 다 흑인 선수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흑백 혼혈팀으로는 우승을 차지할 수 없다”라는 선고를 내렸다.

브라질의 바르보사 골키퍼는 기자단을 통해 1950년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되었지만 이후 단 한 번만 브라질 대표선수로 뛸 수 밖에 없었다. 지지아의 골을 막지 못한 책임으로 바르보사 골키퍼는 국가적 비극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바르보사 이후 흑인선수는 40여년 동안 브라질 대표팀의 골키퍼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바르보사에 대한 국민감정은 최악이었다. 이후 흑인으로 브라질 대표팀의 골키퍼가 된 선수는 1999년 코파 아메리카 대회에 출전했던 디다가 유일했다.

***“홈에서 월드컵 트로피 안고싶다”**

브라질 축구의 성공비결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흑인 노예들이었다. 브라질의 흑인노예들은 미국에 비해 6배나 많은 약 350만명에 달했는데 그들의 주요 임무는 커피,사탕수수등의 재식 농업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들이 훗날 브라질 축구 발전의 핵심적 존재가 될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1888년 브라질은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켰고 이들은 산업화가 진행중인 도시로 나아가 빈민층을 형성했다.

브라질에서 이런 사회변화가 일어 날 무렵 상파울루와 리우에서 축구가 태동했지만 흑인들은 백인들의 축구 경기모습을 어깨너머로 지켜보는데 만족해야 했다. 흑인들은 양말뭉치 등으로 공을 만들어 길거리에서 그들만의 축구(Kickabouts)를 하기 시작했고 이후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선수를 뽑았던 최초의 브라질 프로 팀 바스코 다 가마 덕분에 정식 축구선수가 될 수 있었다.

브라질 축구선수들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경제위기 상황 속에서도 경기장을 찾아 주는 팬들을 위해 항상 ‘세계 최고’가 돼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두 어깨에 지고 있다. 때문에 일부 스포츠 전문가들은 “브라질 축구 대표팀의 감독을 하면 수명이 최소 10년은 단축된다”고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축구왕국’ 브라질도 아직 달성하지 못했던 홈 그라운드에서의 월드컵 우승은 ‘마라카냥의 비극’을 가슴에 한 켠에 간직하고 있던 브라질 국민들에겐 최고의 축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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