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국축구의 월드컵 4강신화 이후 국내 축구선수들의 유럽리그 진출이 러시를 이루고 있으나, 국내 언론들의 관련보도는 지나치게 연봉이나 조건 등 외형에만 초점을 맞춰 눈쌀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연봉만 중시하는 국내언론 보도**
한 예로 지난해 8월 터키 트라브존 스포르의 유니폼을 입었던 이을용 선수의 경우 높은 이적료와, 터키에 있는 국내기업들의 '홍보효과'가 강조되면서 스포츠 신문들과 방송에서 이를 대서특필했었다. 하지만 이을용 선수의 부상과 트라브존 스포르의 이적료 체불문제가 알려지자, 언론은 "이을용 선수의 터키 진출은 잘못됐다"는 쪽으로 보도방향을 1백80도 틀었다.
이런 문제가 더욱 불거진 것은 최근 김남일 선수의 네덜란드 진출.
김남일 선수는 임대료 없이 2만5천유로의 월봉만으로 네덜란드 프로축구 리그 13위팀 엑셀시오르 로테르담(Excelsior Rotterdam)에서 뛰게 됐다. 국내 언론들은 이에 대해 '무능력한 에이전트사'와 '스포츠 마케팅의 부재'라는 키워드를 내세우며, 국내 최고 스타중 한 명인 김남일 선수의 네덜란드 진출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올랐다고 유럽시장이 한국선수를 높게 평가하지는 않는다"라며 "실력있는 선수만이 유럽진출을 도모해야 국내 프로 축구도 살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다.
물론 월드컵 4강을 이룬 국가대표선수이자 '김남일 신드롬'을 일으키며 소녀팬들에게 절대적 인기를 누렸던 김남일 선수의 계약조건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선수의 계약조건 때문에 모든 게 잘못됐다는 식의 논리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지금 우리 언론에게 필요한 것은 '입학성적'보다는 '졸업성적'에 초점을 맞추는 유연한 사고의 전환이다. 다시 말해 네덜란드 리그를 미국 프로야구의 마이너리그로 가정하고 잉글랜드나 스페인 리그 등을 메이저리그로 생각한다면, 마이너리그의 경우 연봉같은'입학성적'보다는 향후 어떤 팀으로 스카웃돼 가느냐는'졸업성적'이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축구 중계무역'**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97학번, 83학번' 등 학교의 입학연도를 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입학연도 대신 졸업연도를 주로 쓴다. 예를 들어 '교수'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잉글랜드 프레미어리그 아스날(Arsenal F.C)의 프랑스인 감독 아슨 웽거(Arsene Wenger)는 스트라스부르 대학 경제학과에서 학위를 받은 1974년을 자신의 학번으로 소개한다. 대학교 입학을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졸업을 보장받는 우리와는 달리,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입학심사보다도 졸업심사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럽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축구의 경우도 '입학'보다는 '졸업'을 중요시하기란 마찬가지이다. 특히 김남일 선수가 진출한 네덜란드의 경우가 그러하다.
60~70년대 '토탈 푸트발(Totaal Voetbal:토탈 축구)' 혁명의 대표주자였던 네덜란드는 그후 과학적인 유소년 축구 프로그램 개발과 함께 이른바 '축구 중계무역'을 전면에 내세워 유럽축구의 열강자리를 지키고 있는 독특한 국가다. '축구 중계무역'은 네덜란드 국내리그인 에레디비지에(Eredivisie)에서 값싸고 잠재력있는 젊은 선수를 잘 조련해 잉글랜드, 스페인, 이탈리아등의 빅 마켓에 내다파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축구 중계무역으로 가장 재미를 본 구단은 히딩크가 감독으로 있는 PSV 아인트호벤(PSV Eindhoven)이다.
아인트호벤은 1988년 챔피언스리그 우승 이후 브라질의 호마리우를 스카우트했고 이후 호마리우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며 93년 4백50만달러의 이적료로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F.C Barcelona)에 팔았다. 또한 아인트호벤은 호마리우의 공백을 메꿀 선수로 17세의 축구신동 호나우두를 선택해 탁월한 선수 스카우트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호마리우와 호나우두는 각각 1994년과 2002년 조국 브라질에 월드컵 트로피를 안긴 골게터로서 성장했다.
***제3세계로 눈돌린 유럽축구 **
최근 잉글랜드 ITV를 비롯한 유료 스포츠 방송업체들의 잇따른 도산은 중계권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유럽 축구시장을 얼어붙게 했다. 이에 따라 유럽구단은 제3세계로의 시장 확대를 빠르게 추진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명문구단 유벤투스(Juventus)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리비아와의 '아랍 마케팅'에 착수했다. 유벤투스는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가다피의 아들 알 사드 가다피가 지분의 12%를 보유하며 제2의 주주로 떠올랐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지난해 8월 이탈리아 슈퍼컵 유벤투스와 파르마(Parma)의 경기는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서 치뤄졌다. 두 팀간의 경기가 더욱 관심을 끈 이유는 이탈리아 프로축구의 개막전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기를 통해 유벤투스, 파르마 두 구단이 받은 보너스는 45만파운드였으며 이탈리아 리그측은 해외개최의 대가로 22만5천파운드를 챙겼다.
유럽구단 가운데 '아시아 마케팅'에 앞장선 팀은 잉글랜드의 에버튼(Everton F.C). 최근 잉글랜드 최연소 국가대표를 노리는 웨인 루니와 함께 프레미어리그에서도 5위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에버튼은 2002년 중국의 전자회사 케이잔(科健)과의 유니폼 스폰서 계약의 조건으로 중국 대표팀의 미드필더 리 티에와 수비수 리 웨이펑을 임대선수로 데려왔다. 중국 IT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는 선전(深玔)시에 축구팀을 갖고 있는 케이잔은 성공적으로 선수를 '입학'시킨 셈이다.
하지만 리 웨이펑 선수는 포지션 중복문제와 함량미달이라는 평가가 쏟아지면서 선발출장 기회를 잡지 못했고 일각에서는 '에버튼 구단과 케이잔에 의해 희생당한 선수'라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아스날에 진출한 일본의 월드컵 스타 이나모토의 경우도 아스날 구단측의 경제적 이익외에는 특별히 기대할 것이 없는 계약이었다.
이탈리아 세리에 A 베네치아 (AC Venezia)에 '일본특수'를 노리고 입단했던 나나미 히로시 선수도 일본언론을 통해 크게 다루어졌지만 현지적응 실패로 좌절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이처럼 아시아 선수들의 유럽진출을 '입학'이라는 한쪽 면을 가지고만 논평하는 것은 그 본질적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 선수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은 채 유럽 명문 구단에 비싼 돈을 받고 입단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장기적 안목의 노력만이 살길**
유럽진출을 꿈꾸는 축구선수들이 좋은 '입학성적'을 받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선수의 실력과 잠재력, 에이전트의 해외구단에 대한 영향력, 국내기업들의 스폰서십 참여와 중계권을 둘러싼 경제적 효과, 국내구단 및 언론에서의 홍보 등이 잘 어우러져야 한다. 반면 네덜란드나 벨기에 등 유럽 빅 리그 진출의 전초기지에 모여든 선수들의 경우는 좋은 '졸업성적'을 거둬 유럽 축구문화에 빨리 적응함으로써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게 최대관건이다.
네덜란드에 진출한 송종국, 박지성, 이영표, 김남일 선수들의 최종목표는 대부분 세계최고 수준인 잉글랜드, 스페인 리그에 입성하는 것이다. 이들이 빅 리그로 가기 위해 선택한 네덜란드 구단과의 계약조건은 길게 보면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현지적응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부족하다면 선수들의 좋은 계약조건은 큰 의미가 없다.
김남일 선수가 엑셀시오르에서 5개월이란 짧은 기간동안 인상깊은 플레이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송종국(페예노르트), 박지성(PSV 아인트호벤)에 비해 매우 불리한 상황이다. 김남일의 운명은 오는 3월8일(현지시각) 펼쳐지는 페예노르트와의 경기에서 갈릴 공산이 크다.
월드컵 이후 소속팀인 전남 구단을 통해 유럽진출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김남일 선수는 이제 축구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월드컵에서의 투혼과 '진공청소기'로서의 위력을 네덜란드에서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뿐이다. 앞으로 김남일 선수가 비록 '입학'은 순탄치 않았지만 '졸업성적'이 뛰어난 선수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주목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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