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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법살인’ 주도한 3인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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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법살인’ 주도한 3인의 주역

신직수 중정부장ㆍ민복기 대법원장ㆍ이용택 중정6국장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이었다'는 의문사진상규명위의 발표는 절대권력에 의해 희생된 8인의 명예회복이 뒤늦게나마 이뤄졌다는 점에서 뜻깊다.

그러나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과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사법살인' 집행자들의 행적은 모순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당시 인혁당 사건 수사 및 재판의 최고책임자였던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민복기 대법원장, 이용택 중정 6국장의 '화려한 인생'을 짚어본다.

참고로 신직수 중정부장은 지난해 사망했고, 민복기와 이용택 두 사람은 현재 생존해 있다. 인혁당 유가족과 피해자들은 이들을 상대로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이어서, 살아있는 두 사람의 대응이 주목된다.

***박정희 정권 최대의 막후 인물 신직수**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혹독한 고문과 증거조작을 담당한 중앙정보부의 총 책임자 신직수 부장.

사건 당시 그는 "민청학련이 공산지하 배후분자들의 조종을 받아 노농정권을 수립하려고 유혈 폭력데모를 획책했다"고 발표하고 학생과 재야인사 1천24명을 구속했다. 이중 32명은 이후 재판에서 사형과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36세에 검찰총장에 발탁, 역대 최연소로 기록되며 취임 후 무려 7년반 동안 검찰총장 자리를 독식하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함께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초고속 승진 배경에는 박정희씨의 사단장 시절 법무참모를 지낸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검찰총장 취임 당시에는 평검사가 일약 총장에 임명돼 고검장들이 크게 반발, 취임식에 불참하는 사태도 빚어졌으나 청와대와 군, 중앙정보부의 삼각축이 전횡을 휘두르던 시기였으므로 중정 차장이던 그의 검찰총장 취임은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여졌다. 더불어 검찰조직의 위상은 절대권력의 충실한 대리자로 전락했다.

검찰총장 퇴임 후에는 곧바로 법무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그는 특히 법무장관 재임 시절 '헌법심의위원회'에 참여, 유신헌법 조문화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그는 79년 대통령 법률담당특보를 마지막으로 공직생활을 떠난 뒤에는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지난해 9월에 작고했다. 당시 언론은 그에게 박정희 정권 최대의 '막후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사법부 권력 예속화의 주역 민복기**

군법정에서 날조된 공판조서를 근거로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지은 민복기 대법원장.

그의 부친은 대한제국 황실의 척족으로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에 앞장선 친일파 민병석이다. 그 역시 일제 강점기인 1937년에 경성제국대학 법과 졸업 후 40년 경성지방법원 판사, 45년 경성복심법원 판사 등 승진을 거듭하며 친일의 대를 이었다.

박정희 집권 시절에는 1968년 10월부터 78년 12월까지 무려 10여년동안 5, 6대 대법원장을 연임하며 박정희 철권통치를 방조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대법원장 재임기간은 역대 최장수로 기록되나 후대 법조인들은 그 시절을 소위 사법부의 '암흑기'로 기록하고 있다.

71년 국가배상법 위헌판결을 계기로 박 정권이 사법탄압을 개시해 법관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로 이어진 '사법파동', 유신헌법에 따른 '재임용파동' 등을 거치며 사법부의 권력예속화가 진행된 시기가 그의 재임시절이다.

"나라의 통일과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구조가 가장 집중적,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유신헌법의 본질인 이상 사법권의 존재양식 또한 이에 발맞춰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다."(민복기 대법원장 73년 신년사)

또한 그의 재임기간동안 대법원은 박 정권이 권력안보의 최후수단으로 사용한 긴급조치에 대해서까지 '무효로 볼만한 근거가 없다'며 합헌 결정을 내리고 독재정권의 손을 들어줬다.

수많은 긴급조치 위반자들에 대한 대대적 처벌이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1977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피고인 1백16명 가운데 91명에 대해 1년 이상의 징역이 선고됐고 78년에는 1백89명 가운데 1백53명이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았다.

대법원장 이임 후에는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고, ▲80~84년 국토통일원 고문, ▲80~88년 국정자문위원, ▲86년 헌정제도연구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지난 2000년에는 '자랑스런 서울법대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공안수사 책임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용택**

인혁당 사건수사를 총지휘한 이용택 중정 6국장.

3공화국 중앙정보부 공안수사 책임자로 명성을 떨친 그는 81년 고향 경북 달성에서 11대 국회에 입성(민정당)한 이래 85년 12대 국회의원, 97년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특보 등을 역임하며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특히 "영호남 화합과 정당간 정권교체에 기여하기 위해 국민회의에 입당키로 했다"며 97년 엄삼탁씨 등과 국민회의 입당을 천명할 당시에는 과거 'DJ 사찰'을 대표하던 중정, 안기부 출신 인사들의 이례적인 전향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그의 입당 배경은 DJ에 가해질 '색깔론'과 '안보위기론'을 차단한다는 데 있었으나 DJ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재빠르게 배를 갈아탔다는 게 정치권의 지배적 평가였다.

국민회의 내부에서는 재야인사들은 물론 정치인들에 대한 탄압에 앞장섰던 그의 입당에 "원칙없는 처사"라며 반대 의견이 거셌다는 후문이다. 심지어 안기부에서조차 "이미 정치판의 때가 묻을 대로 묻은 사람"이라며 "그를 자랑스런 선배로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국민회의 입당 후 97년 대선에서 DJ의 특보로 활동하며 대구,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은밀한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활동 외에도 그는 ▲87년 자유민주총연맹 부위원장 ▲94년 자유민주민족회의 사무총장 ▲98~2000년 경북관광개발공사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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