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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데이, 중앙일보 기사 표절

4일자 '이회창-이한동' 기사, 글 흐름ㆍ문구까지 똑같아

첫 문장은 다르다. 그러나 누가 봐도 똑같은 기사다.

스포츠 신문 굿데이(Good day)가 중앙일보 기사를 거의 그대로 베낀 것으로 드러났다. 굿데이는 4일자 가판에 '정치판에 情治는 없다'는 기획기사 중 이회창-이한동 '40여년 情 물거품'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와 이한동 전 총리 두 사람이 대학 때부터 수십년간 둘도 없는 친구였다가 정적으로 돌아서기까지의 사연을 소개한 기사다.

문제는 이 기사가 지난 7월 22일자 중앙일보 '이연홍의 정치보기 - 상처입은 우정'과 거의 흡사하다는 것이다. 굿데이는 누가 봐도 베낀 것이 분명한 기사를 자사 소속 기자의 이름으로 실었으며, 중앙일보를 인용하지도 않았다. 3일자로 인터넷에 미리 실은 기사는 '상처입은 우정'으로 심지어 제목까지 똑같다.

***소개하는 일화, 심지어 문구도 똑같아**

굿데이의 기자가 이연홍 기자의 기사를 전혀 모른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취재해 쓴 기사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보기엔 글 전체 흐름뿐 아니라 소개하는 일화도 똑같다. 중간중간 순서를 뒤섞고 단어를 바꿨을 뿐이다.

"이한동과 이회창. 두 사람은 원래 '야자'하는 친구 사이다. 나이는 이한동씨가 한살 많다. 하지만 이회창씨가 서울대 법대를 한해 먼저 들어갔고 고시는 두해 먼저 됐다." (중앙일보 7월 22일자 기사)

"이한동 전 총리와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는 원래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나이는 이 전 총리(68)가 1살 더 먹었으나 이 후보가 서울대 법대를 한 해 먼저 들어갔다. 고시도 이 후보가 두 해 먼저 통과했다. 그래서 둘이는 '야자'하며 지냈다."(굿데이 9월 3일자 기사)

"두 사람은 서울지법 판사 시절 같은 방에서 근무했다. 11명의 판사가 한 방을 썼다고 한다. 그 뒤 이한동씨가 영등포지청 부장검사를 할 때 이회창씨는 영등포지원장을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어울렸다. 포커도 하고 술깨나 마셔댔다. 버스 값이 떨어질 때까지 술을 마신 적도 있었다. 그럴때면 종종 두 사람은 걸어서 성북동 이회창씨 집으로 갔다. 마당에 서서 이회창씨는 외쳐댔다. "여보, 맥주 주시오." 한인옥씨는 쟁반에 맥주를 올려 들고 나왔다. 두 사람은 선채로 맥주를 들이켰다. 병째로 들이켠 이한동씨는 다시 걸어서 미아리 집으로 가곤 했다."(중앙일보 7월 22일자 기사)

"서울지법 판사 시절에는 한방에서 근무했다. 두 사람은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포커도 함께하고 술도 무척 마셔댔다. 두 사람은 종종 차비를 털어 술을 먹고는 걸어서 집까지 가기도 했다. 미아리가 집이던 이 전총리는 성북동 이 후보의 집에 들러 이 후보 부인이 내오는 맥주를 마당에 선 채 병째 마시고 집으로 향하곤 했다."(굿데이 9월 3일자 기사)

또 지난 97년 '대권'이라는 같은 꿈 때문에 두 사람이 돌아서게 된 일화를 소개하면서 "정치판이 두 사람의 수십년간의 우정을 갈라놓았다"는 결말에 이르는 과정도 동일하다.

***기사 베끼기, 사라져야할 악습**

다른 기자의 기사를 무단 도용하는 경우는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매일경제신문은 지난 97년 10월 14일자 '정보통신' 특집면에 '대기업 속속 참여 무한경쟁 돌입'과 '전문인력 부족 스카우트전 예고'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제목만 틀린 뿐 한국경제신문이 같은 해 7월 25일자와 30일자에 특집보도한 'PC 통신시장 무한경쟁시대 돌입'과 '인터넷 업계 인력대란 조짐'의 상당부분을 무단 전재한 것이었다. 당시 이 기사를 쓴 담당 기자는 징계조치 됐다.

또 한겨레신문 지난 해 4월 9일자 사설 '화염병은 사라져야 하지만'이 불과 며칠 전인 4월 3일자 조선일보 '화염병은 방화다' 사설의 일부 내용을 표절한 것으로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그 후 해당 논설위원은 사직했으며 논설주간은 3개월 감봉 조치됐다.

이외에도 타 언론사 기자의 기사를 받아쓰면서 "…알려졌다" "…전해졌다" "…밝혀졌다"며 출처 표기를 하지 않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다른 기자들의 기사 베끼기. 이제는 사라져야할 우리 언론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다음은 중앙일보 7월 22일자와 굿데이 9월 4일자(가판) 기사 전문이다.

***중앙일보 7월 22일자. 이연홍의 정치보기 - 상처입은 우정**

이한동씨에겐 오랫동안 간직해온 꿈이 있다. 대권을 향한 꿈이다. 남들은 무모하다 할지 모른다. 객관적 정황은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도전하려 한다. 이회창 후보의 대항마가 되고 싶어한다.

이한동과 이회창. 두 사람은 원래 야자하는 친구 사이다. 나이는 이한동씨가 한살 많다. 하지만 이회창씨가 서울대 법대를 한해 먼저 들어갔고 고시는 두 해 먼저 됐다. 두 사람은 서울지법 판사 시절 같은 방에서 근무했다.

11명의 판사가 한 방을 썼다고 한다. 그뒤 이한동씨가 영등포 지청 부장검사를 할 때 이회창씨는 영등포 지원장을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어울렸다. 포커도 하고 술깨나 마셔댔다. 버스값이 떨어질 때까지 술을 마신 적도 있다. 그럴 때면 종종 두 사람은 걸어서 성북동 이회창씨 집으로 갔다. 마당에 서서 이회창씨는 외쳐댔다.

"여보, 맥주 주시오."

한인옥씨는 쟁반에 맥주를 올려 들고 나왔다. 두 사람은 선채로 맥주를 들이켰다. 병째로 들이켠 이한동씨는 다시 걸어서 미아리 집으로 가곤했다.

두 사람은 정말이지 허물없는 사이였다.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았고 나라걱정도 함께했다. 이회창씨는 이한동씨에게 많은 덕담을 해주었다.

"너는 크게 될 사람이니 정치를 해라."

"너도 정치를 하지 그러니."

이회창씨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 아버지 얘기를 했다고 한다. 정치를 하면서 이것 저것 들춰지는 게 싫다고 했다. 이회창씨의 덕담대로 이한동씨는 정치를 했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다시 마주친 곳은 신한국당이었다. 친구의 모습이 아닌 라이벌로 만났다. 꿈은 같았고 이해는 달랐다. 대권의 꿈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YS의 얘기.

"97년 3월 나는 이한동이를 신한국당 대표에 임명하려 했어. 그런데 발표를 앞두고 그것이 MBC 9시 뉴스 톱으로 보도됐어. 시킬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야. 만약 그때 이한동이를 대표시켰으면 이한동이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 거고 DJ는 대통령이 못되는 건데."

이회창씨의 반발때문이었다. 현철씨 사건 와중의 YS로선 어쩔 수 없었다. 당 대표직은 이회창씨가 가져갔다. 이회창씨는 이후 총재가 됐고, 이한동씨는 그 밑에서 대표를 했다.

그러나 이한동씨는 거의 태업을 하다시피했다는 게 이회창씨 쪽 사람들의 얘기다. 그들은 지금도 그때의 이한동 대표를 비난한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정적(政敵)의 입장으로 바뀌었다. 이제 두 사람은 철저히 서로를 깔보고 무시한다.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인 듯하다. 이회창씨 측근에게 물어봤다.

"이한동씨가 이회창씨 대항마가 된다면 어떻겠어요?"

"그렇게 된다면야 우리로선 참으로 고맙지요."

우습게 본다는 얘기였다. 그게 이회창씨의 생각이라고 했다. 이한동씨 역시 이회창씨를 비슷하게 평가한다. 아주 편협한 사람으로 본다. 그래서 자기도 한나라당에서 쫓아냈다는 것이다. 이한동과 이회창. 두 사람 사이에 이제 우정의 흔적은 없다. 상처입은 우정은 막연한 증오보다 더한 미움인가 보다.

***굿데이 9월 4일자(가판). 이회창-이한동 40여년 情 물거품**

정치는 수십년 우정도 상처입게 한다. 그리고 상처입은 우정은 막연한 미움보다 증오의 골을 더 깊게 한다. 이한동 전 총리와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는 원래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지금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한때 주위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격의없는 우정을 나눴다.
 
나이는 이전총리(68)가 1살 더 먹었으나 이후보가 서울대 법대를 한해 먼저 들어갔다. 고시도 이후보가 두해 먼저 통과했다. 그래서 둘이는 '야자'하며 지냈다. 서울지법 판사 시절에는 한방에서 근무했다. 그뒤 이전총리가 검사복으로 갈아입고 영등포지청 부장검사를 할 때 이후보는 영등포지원장을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포커도 함께하고 술도 무척 마셔댔다. 두 사람은 종종 차비를 털어 술을 먹고는 걸어서 집까지 가기도 했다. 미아리가 집이던 이전총리는 성북동 이후보의 집에 들러 이후보 부인이 내오는 맥주를 마당에 선 채 병째 마시고 집으로 향하곤 했다.
 
나라 걱정은 둘의 우정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후보는 이전총리에게 "너는 크게 될 사람이니 정치를 해라"라는 덕담을 자주했다. 이전총리도 이후보에게 정치를 권했으나 이후보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치를 하면서 아버지 등 집안 이야기가 이것저것 들춰지는 것이 싫다고 했다.
 
이전총리는 이후보의 덕담대로 81년 11대 국회의원으로 정치계에 입문했다. 원내부총무·총재비서실장 등 초선으로서는 비교적 승승장구했다. 84년에는 민정당 사무총장까지 올랐다. 이어 16대까지 그는 의원직을 한차례도 놓치지 않으며 경기 북부의 맹주로 정치적 기반을 굳건히 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마주친 곳은 96년 신한국당에서였다. 이후보가 대법원 대법관과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거쳐 정치에 입문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전총리는 국회부의장이었다. 두 사람 모두 꿈은 대권이었다. 같은 꿈은 수십년 우정에 금이 가게 했다.
 
결정적 계기는 YS가 제공했다. 97년 3월 이전총리를 신한국당 대표로 임명하려다가 이후보가 반발하자 결국 이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현철씨 문제로 코너에 몰렸던 YS로서는 이후보의 강력한 반발에 어쩔 수 없었다. 이후 이후보는 총재가 됐고 이전총리는 그 밑에서 대표를 했다.
 
당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동안 이후보측은 이전총리가 태업으로 일관한다며 불만이 높았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져 정적이 됐다. 이전총리는 이후보를 '편협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이후보측은 이전총리를 대통령감이 안되는 '우스운 상대'로 보고 있다. 정치판이 두 사람의 수십년 우정을 변화시킨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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