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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최종길 교수 위법한 공권력에 의해 숨졌다”

의문사진상위, “타살 가능성 높다”

지난 73년 간첩혐의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의문사 당한 고 최종길 서울법대 교수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위법한 공권력에 의해 숨졌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는 27일 오전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17개월간 조사한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의 진상규명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같은 사실을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최 교수가 간첩 사실을 자백했다는 당시 중정 발표가 거짓"임을 지적하면서 "최 교수는 중정의 고문과 협박 등 불법 수사에도 불구하고 강요된 진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위주의적 공권력 행사에 순응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행위 또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활동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 만큼 최 교수의 죽음은 민주화 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발표했다.

진상규명위는 또 "특히 최 교수의 경우 사망 이후에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 유신반대 등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근거가 됐던 점을 감안해 보면 최 교수의 저항은 민주헌정질서를 확립하고 국민의 자유권리를 신장시킨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 타살 가능성 크다"**

진상규명위는 최 교수가 자살했다는 중정 발표와 달리 타살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진상규명위는 최 교수가 타살됐다고 볼 만한 직접적인 증거로 당시 공작과장 안홍용 및 수사단장 장송록의 진술을 들었다.

장송록씨는 "최 교수는 당시 심한 고문을 당한 상태에서 7층 화장실뿐만 아니라 그 어디도 제 발로 걸어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더구나 화장실 창문을 타고 넘어 자살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면서 "이미 고문으로 죽었거나 가사 상태에서 사고 현장으로 옮겨진 것이 틀림없다"고 진술했다.

안홍용씨는 "당시 김종한 계장이 취침하고 있는 조사실로 들어와 7층 비상계단으로 데리고 가 손짓으로 미는 흉내를 내면서 '여기서 최종길을 밀어버렸어'라고 하여 그 즉시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와 비상출구로부터 약 2미터 떨어져 있는 시체를 확인했다"면서 "타살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일본의 카미야마 시게타로 박사의 법의학 소견도 타살 증거로 제시했다. 카미야마 박사는 최 교수의 부검사진을 보고 "최 교수의 사망을 추락으로 위장하기 위해 사체를 바닥에 던지거나 발바닥에 망치 등으로 외력을 가해 생긴 사후 손상을 볼 수 있다"고 소견을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또 ▲ 피의자 신문조서, 현장검증조서, 수사보고서 등 송치서류의 대부분이 사후에 조작된 점 ▲ 고문사실의 은폐 ▲ 사체의 상태 및 위치, 자세, 착의 상태 등 현장을 조작한 점 ▲ 비정상적인 부검 절차 및 중정에서 부검 감정서 원부를 빼내려 기도한 점 등도 타살의 간접적인 증거로 제시했다.

진상규명위는 "그러나 '직접 타살'이 아니라 하더라도 수사관들의 고문·협박이 최 교수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최 교수는 위법한 공권력의 직·간접 행사로 숨졌음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이같은 조사결과를 지난 25일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며 28일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 최 교수 및 그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를 요청할 계획이다.

한편 최 교수의 고문 및 사망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당시 중정 직원들에 대한 형사고발 여부와 관련, 진상규명위는 이들의 범죄가 형사소송법상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를 들어 고발 및 수사의뢰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진상규명위가 이날 발표한 결정문 전문이다.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결정**

사 건 : 진정 제7호 최종길(崔鍾吉) 사건

진 정 인 : 최 광 준(의문사한 자의 자) 외 347명

피진정기관 : 국가정보원 (구 중앙정보부)

의문사한 자 : 최 종 길
생년월일 1931. 4. 28.생 (사망당시 42세)
직업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
사망일 1973. 10. 19.

주 문 :

1. 의문사한 자 최종길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다고 인정한다.

2. 이 사건에 관하여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 의문사한 자 최종길 및 그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를 요청한다.


이 유 :

1. 과거 수사결과의 요지

가.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이라고 함) 수사 5국

1958. 1.경 의문사한 자 최종길 교수(이하 최종길이라 한다)는 불란서 파리에 유학중인 노봉유의 연락을 받고 위 노봉유의 기숙사에서 7일간 기거하면서 외세에 의해 양단된 국토와 민족이 평화적으로 통일하려면 유학생들이 혁명대열에 선봉적 역할을 하여야 한다며 혁명대열에 참여하라는 권고에 동조하고,

1958. 10. 하순경 노봉유와 함께 동백림 주소불상의 아파트 2층에서 약 10일간 북한 공작책 이원찬등으로부터 세뇌교육을 받고 유학생을 동백림으로 데리고 오라는 지령을 받고, 공작금 300불을 수수하였으며,

1960. 5.경 동백림을 출발하여 모스크바, 북경을 경유 평양에 도착하여 약 17일간 체류하면서 노동당에 입당함과 동시에 주체사상 등의 교육을 받고, 학원에 침투하여 학생들에게 반정부 데모를 하도록 선동하고, 양심적인 제자를 포섭하여 제 3국을 통하여 월북시키라는 지령을 받고 공작금 2,000불 수수하고,

1972. 6. 하순 독일 쾰른에서 약 1개월 동안 처 백경자와 체류하면서 노봉유로부터 학생들에게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해 북한 적십자 측의 제안 사항을 전폭적으로 지지할 수 있도록 여론을 환기시키고, 용공세력의 확장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선동하라는 지령을 받고 공작금으로 700불을 수령하고 같은 해 8. 28. 일본을 거쳐 귀국하여,

1973. 10. 19. 새벽 01:40경 간첩임을 자백한 후 남산분청사 7층 화장실에서 조직을 보호할 목적으로 투신자살하였다.

나. 중정 감찰실

중정은 1973. 10. 16. 14:00경 최종길을 임의 출석시켜 분청사 지하조사실에 신병을 확보하고 10. 18. 10:00까지 2일간 계속 신문하여 일부의 범죄사실을 자백 받았으나 서독에서의 이재원 접촉상황, 남한 잠입 후의 활동상황 등에 대하여는 범행을 부인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함에 장시간 환기가 불완전한 지하실에 체재함으로써 최종길에게 영향을 미칠 정신적 및 육체적 피로를 고려하고, 신문 환경을 바꿈으로써 최종길의 심경변화에 의한 자백을 촉구할 목적으로 10. 18. 10:00경 분청사 7층 합동신문실로 이동 최종길을 휴식케 하였다가, 동일 18:30경부터 신문을 계속하는 한편 자필 진술서를 작성케 하던 중 최종길이 1973. 10. 19. 01:40경 용변을 호소하므로 참여수사관인 김상원은 최종길을 감시하여 7층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게 하였던바, 소변 후 변기에 2~3회 구토하는 것을 본 김상원은 불쾌하다는 이유로 변소 문 앞에서 고개를 돌려 감시를 소홀히 하자, 최종길은 변소창문에 올라 투신자살할 것을 기도함에 김상원은 최종길의 발목을 잡고 제지하여 내려오라고 지시하였으나 "놓지 않으면 뛰어 내리겠다"고 위협하므로 김상원은 당황한 나머지 발목을 놓고 담당수사관 차철권 및 경비원을 고성으로 부르게 되자, 최종길은 범죄사실을 자백하게 되면 자신의 유죄는 물론 국내관련자가 검거됨으로써 간첩조직의 노출을 두려워하고 가족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7층(사실상 6층이나 4층이 없어 7층으로 호칭, 이하 같음) 화장실 창문에서 투신하여 두개골 파열로 사망한 것이다.

다. 서울지방검찰청 (1988. 10. 6. 내사사건)

심장 및 심낭 파열이 직접적인 사망원인으로 된 것으로 판단되는 바, 본 건 사체에 있어서 심장 및 심낭 파열상은 체외표에서 좌측흉부를 가격받은 흔적이 없고 좌측 제3 및 제5 늑골이 골절되었음에도 그 사이에 있는 제4 늑골은 골절되지 않은 점에 비추어 볼 때에 둔기에 의한 가격일 가능성은 배제되며, 복부 체외표에 외력을 받았다고 볼 좌상, 찰과상, 피하출혈, 근육출혈 등 흔적이 없고 주위 장조직에도 손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복부 및 하복부 장간막이 파열된 것은 복부에 직접 외력이 가하여져 생긴 것으로는 볼 수 없고 신체가 상당한 속력으로 움직이다가 물체에 부딪혀 발생된 것으로 판단되고 중족골 골절도 위와 같은 상황에서 발생되는 손상인 점 등을 종합하면 추락으로 인하여 위와 같은 치명상을 입은 사실이 인정되고, 장간막 파열 부위, 늑골 골절 부위 주위에 사반의 형성이 없는데도 출혈현상이 나타난 점에서 보면 이미 사망한 후에 추락하여 위와 같은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은 배제된다.

피내사자 차철권 등은 최종길이 노봉유와 연계된 간첩임을 자백하였으나 상세한 내용을 신문하기 전에 투신자살하여 날인한 조서 등 증거물이 될 만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변소하는바,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는 노봉유의 진술을 듣기 전에는 사실규명 불가하다고 하여 내사 종결하였다.

2. 이 사건 진정의 요지

1972년 유신헌법을 공포한 지 1년이 채 못되어 1973년 중반 박형규 등의 내란 음모기도 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서울대 문리대의 반유신 시위를 필두로 한 전국 대학가의 반유신 시위 등으로 궁지에 몰린 박정희 정권이 이를 진압할 목적으로 학원사찰의 강도를 높이던 시기에 최종길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아 이 위기를 탈출할 목적으로 공작을 진행하였으며, 강도 높은 고문으로 최종길을 사망케 한 다음 이를 은폐할 목적으로 최종길이 간첩임을 자백하고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것으로 사실을 조작한 것이다.

3. 인정되는 사실 관계

가. 최종길의 사망 경위

⑴ 내사 착수 배경

중정이 최종길을 내사한 배경은 처벌을 하기 위한 수사 목적이 아니었고 자수 간첩의 불확실한 제보에만 의지하여 공작차원에서 수사과가 아닌 공작과에서 이루어졌다.
최종길에 대한 조사 착수도 긴급체포나 정식 소환이 아니라 당시 중정 감찰실 직원이었던 최종길의 동생 최종선을 통하여 1973. 10. 16. 14:00경 자진 출석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곧 바로 중정 남산 분청사 지하 조사실에 수용되어 조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⑵ 조사 과정

대공 혐의에 대한 아무런 내사 준비 없이 착수된 조사는 주로 최종길에게 독일 유학시절에 대하여 진술서를 몇 차례나 작성하게 하는 방법으로 시작되었고 진술서 사이의 모순된 점을 추궁하는 방법이었다. 최종길은 중정 수사관들의 대공혐의에 대한 계속된 심문에 처음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저항하였고 완강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중정 수사관들은 처음에는 최종길의 독일 유학시절 학비 및 생활비 조달 경위를 중심으로 추궁하였음에도 특별한 증거가 나오지 않자 조사 이튿날 그의 동의를 얻어 자택을 실질적으로 압수수색하였다. 그 과정에서 최종길의 고교 동창이며 동백림 사건 수배자였던 이모씨의 편지 및 같은 노모씨의 주소가 적힌 수첩이 나오자 중정 수사관들은 최종길을 간첩으로 단정하고 이때부터 최종길에게 갖은 모욕과 협박 그리고 상당한 정도의 고문이 가해졌다. 그러나 위 편지는 단순한 안부 편지에 불과하였고 위 수첩상의 기록도 단순한 주소에 불과하여 간첩사실에 대한 아무런 증거가 될 수 없다.

⑶ 고문

당시 중정 수사관들은 최종길에게 잠 안재우기, 모욕등의 언어폭력, 발길질, 주먹질, 몽둥이질 등 심한 구타, 각목을 무릎에 끼워 발로 밟기 등 상당한 정도의 고문을 가하였다 (참고인 양공숙 중정수사관 진술, 1973. 10. 20.자 중정 감찰기록, 법의학 감정 소견).

다른 수사관들도 고문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나 증거상 최종길의 고문에 참여한 수사관은 차철권, 김상원, 변영철등이다.

더욱이 위와 같은 고문방법 이외에도 최종길에게 런닝과 팬티만 입힌 채로 상당 시간 조사를 받으면서 감내하기 어려운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였다.

⑷ 이후 과정

최종길이 독일 유학시절 호기심에 동백림에 1회 간 것은 사실이나, 중정 발표대로 간첩임을 자백한 사실도 없었고 그 이외에 간첩임을 인정할만한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최종길은 출두한지 만 3일 후인 1973. 10. 19. 중정 남산분청사에서 사망하였다. 최종길이 간첩사실을 자백하고 조직을 보호할 목적으로 중정의 남산분청사 7층 화장실에서 투신 자살 하였다는 당시 중정의 발표 및 그 근거는 아래에서 판단하는 바와 같이 모두 믿기 어렵다.

다. 의문사한 자의 사망 이후의 사실관계

⑴ 송치 서류 허위작성 및 간첩자백 사실의 조작

피의자 신문조서, 현장검증조서, 수사보고서 등 송치서류의 대부분이 최종길의 사후에 조작되었다. 송치서류는 엄격한 증거에 입각하여 작성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증거도 없이 최종길을 간첩으로 단정하는 일련의 문서가 사후에 작성되었다. 차철권의 일방적 진술에 근거하여 수사과에서 송치에 필요한 일건 서류를 허위작성 하였으며 그 서류에는 최종길이 간첩임을 자백하였다는 허위의 내용이 있었고 그에 따라서 최종길이 간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⑵ 현장검증의 조작-검증조서 조작, 현장 훼손, 사체 이동, 현장검증 생략

현장검증조서 상 작성 장소는 남산분청사 7층 사무실이고, 작성한 시점도 1973. 10. 19. 오후라고 되어 있고, 검증시점은 10. 19. 04:30 내지 05:00로 되어 있으나, 실제 참석자로 기재되어 있는 차철권 등과 검사도 실제 현장검증에 참여한 사실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어 현장검증조서의 내용과 검증 사실조차 믿기 어렵다. 또한 현장검증시 사채는 이미 청운동 소재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있었다.

⑶ 고문 사실 은폐

중정의 감찰실 조사 결과 차철권과 변영철 등이 최종길을 상대로 잠 안재우기, 모욕등의 언어폭력, 발길질, 주먹질, 몽둥이질 등 심한 구타, 각목을 무릎에 끼워 발로 밟기 등 고문을 가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중정은 조직적으로 이를 은폐하였다.

⑷ 사체의 이동

검증조서 상의 현장 사진에는 최종길이 반듯이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체를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최종길 사체의 자세나 상태에 대해서 서로 엇갈리는 진술을 하고 있다. 예컨대 사체의 자세에 대한 진술도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엎드려 있었다" 등으로 서로 다르며, 사체의 상태에 관한 진술도 "뇌수가 터졌다, 뼈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등으로 상이하다. 뇌수가 터졌다거나, 뼈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는 진술은 부검감정서의 결과와 명백히 배치되는 진술로 신빙성이 없다. 부검감정서에는 머리 부분에 단 한 군데의 파열창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진을 감정한 국내외의 일부 법의학자들도 사체를 찍은 현장사진이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사진에 나타난 현장이 바뀌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⑸ 중정의 보상 제의

중정에서는 최종길의 유족에게 3,000만 원의 보상금을 주고 유자녀의 교육을 책임지는 등 성의를 다할 테니 유가족들도 국내의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여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르고 사체는 화장하는 등 성의를 보여달라고 말한 사실이 있다.

⑹ 유럽거점대규모간첩단 사건 조작

중정은 1973. 10. 25. '유럽거점대규모간첩단사건'을 발표하면서 사건과는 무관한 최종길을 간첩단의 일원으로 포함시켰다. 이른바 유럽거점대규모간첩단 사건에서 재판 진행중 무죄 선고된 사람도 있고 일부 유죄로 인정된 사람도 있으나 이 사건과 관련하여 중정 5국(대공과)에서 수사를 받은 사람들이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최종길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최종길이 간첩임을 자백한 사실이 없고 그 외 간첩임을 입증할 아무런 증거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종길을 방송과 언론에 간첩이라고 발표하였다.

⑺ 비정상적인 부검 절차

㈎ 부검의에 대해 자살에 따른 추락사를 암시: 사체 부검을 하기 전에 부검의인 김상현을 중정에 불러 추락자살이라는 사고경위를 설명하였다.

㈏ 절차를 무시한 부검 지휘: 이 사건의 경우 사망사건이 발생한 장소와 시간을 고려할 때 서울지검의 당직검사가 변사사건을 지휘하여야 함에도 이러한 절차는 생략되었다.

⑻ 부검 내용의 문제

부검 자체에도 많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1973년 국과수에서 작성한 부검감정서에는 명백히 나타나는 고문의 흔적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감정서 상의 사진과 설명이 일치하지 않는 곳이 4군데에 이르며, 자·타살을 가리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⑼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에 보관중인 최종길 부검원부를 강압적으로 요구

최종길의 사후 며칠이 지난 시점에서 중정의 수사관 두 명이 협조공문조차 없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찾아와 사체 사진이 포함된 부검 원부를 달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하였다.

⑽ 중정 수사관의 1988년 검찰 조사 직전에 사전공모로 허위진술

검찰조사 내용은 최종길이가 간첩임을 자백했다는 것과 7층 사무실에 올라간 시점, 사망 경위 등 핵심내용이 모두 허위이다. 검찰의 조사를 받기에 앞서 장송록, 차철권, 김상원, 고병훈, 안흥용을 비롯한 5국 직원들이 모여 사전에 대책회의를 하였고 이 자리에서 차철권의 진술을 뒷받침해 주기 위해서 허위 진술을 하기로 공모하였다.

⑾ 서울지방검찰청 내사

1988년 서울지방검찰청 내사 당시 최종길을 수사했던 10국의 수사관들이 사전에 공모를 통해 허위진술을 하였으나 검찰은 이를 밝히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당시 최종길이 간첩 사실을 자백하지 않았고 조사 받는 과정에서 상당한 고문을 받았음이 명백함에도 이를 밝히지 못하였다.

4. 판단

가 . 민주화운동 관련성에 대한 판단

⑴ 이 사건이 발생한 당시는 유신헌법이 북한의 위협 등 국가안보를 이유 삼아 제정, 발효되고 유신헌법에 의하여 정부가 구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아니한 시점이었다. 또한 상당수 국민들과 야당 인사들은 유신헌법과 유신정권에 대하여 반대를 표시하고 있어 정권의 정당성이 도전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즉 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공포되어 시행된 후, 1973년에 들어 정권은 해외에서 반유신활동을 하던 전 대통령후보 김대중에 대한 납치사건을 일으키고 박형규 등 반유신활동인사들을 내란 음모 혐의로 체포하는 등 탄압을 가중시키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궁지에 몰려 있었다.

또한 이 사건 직전인 1973. 10. 2.의 서울대를 필두로 해서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등으로 대학생들의 반유신 시위가 확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⑵ 유신헌법과 그에 기초한 당시의 정치제도의 문제점을 살펴보면

첫째, 비상계엄 등 비정상적인 절차에 의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였으며,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논의조차 생략하는 등 헌법 제정의 절차에 있어 민주질서를 파괴하였고,

둘째, 유신헌법이 의회민주주의나 정당제도 등 일반적인 민주주의적 제도를 상당부분 침해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고,

셋째, 합법적인 정권 교체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봉쇄하였으며,

넷째, 헌법 상 국민의 기본권이 충분히 보장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긴급조치 등 비상통치 수단이 일상화하여 유신헌법 상의 기본권마저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며,

다섯째, 유신헌법상의 최고 권력자가 사망한 후 바로 그 체제가 바뀌었다는 점에서 1인 지배체제의 특징이 강했다는 것이 인정되었고,

여섯째, 당시에도 국제적으로 유신헌법의 제정, 시행의 강행등에 대하여 독재 정치라는 지적을 받아온 점 등으로 보아 유신헌법은 권위주의적 헌법이고 그 정권은 권위주의 정권이라 할 것이어서, 이에 반대한 활동은 특별히 다른 이유가 없는 한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 상의 민주화운동이라 할 것이다.

⑶ 유신헌법과 유신정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점차 거세게 전개되면서 유신체제의 정당성이 부정되고 권위주의 통치가 약화됨에 따라 체제 수호를 담당하고 있던 중정은 간첩사건 발표 등을 통하여 국민들 사이에 안보상의 위기의식을 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를 탄압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하고자 했다.

또한 중정은 그 과정에서 간첩 사건에 대하여 합법적인 조사만을 한 것은 아니고 고문을 통하여 자백을 강요함으로써 진실이 아닌 간첩사건을 발표하여 국민의 위기감을 자극하고 정치적 반대자들의 저항활동을 위축시켜 궁극적으로 권위주의 독재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즉 중정은 권위주의적 정권의 강화를 위하여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불법 납치 등을 자행하고 반정부 인사들에 대하여 내란혐의로 체포를 할 정도로 강압적 탄압 조치를 취하여 왔고 이건 조사의 진행에서 보듯이 수사를 한 결과 진실을 기초로 사실을 확정하는 일반적인 수사절차를 통하기보다는 목적을 설정한 후 사실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공작을 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최종길에 대한 것과 같이 가혹행위 등을 통해서라도 간첩혐의를 자백받는 등의 불법적인 수사를 하였다 (이 사건 이후 중정은 '유럽거점대규모간첩단'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 최종길이 간첩이 아니었음을 알면서도 간첩단의 일원이며 사망한 간첩으로 발표하여 사실을 조작하였다).

수사 과정에서 사실을 왜곡하고, 형사소송법상 피의자의 인권보장을 위한 여러 가지 권리를 봉쇄하며 , 고문 등 가혹행위를 통하여서라도 자백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통치에 있어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고 소위 공안관계 사건에 있어 가혹행위가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것은 권위주의적이고 반민주적 권력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⑷ 중정은 최종길에 대한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근거로 구금, 조사한 것이 아니고 일단 조사를 하면 쉽게 자백할 것이라는 막연한 판단에서 최종길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것이고, 최종길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혐의사실을 제대로 고지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영장없이 구금되었으며 변호사의 조력을 받지 못하는 등 형사소송법 상 피의자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였다.

나아가 강요하는 대로 자백을 하지 아니한다는 이유로 중정 수사관들에 의하여 위에서 기술한대로 심각한 가혹행위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길은 사망시까지 자신이 간첩이라는 강요된 진술을 하지 아니하였다 (중정은 최종길 사망 직후 최종길이 간첩행위를 자백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본 위원회의 조사 결과 허위 발표를 한 것임이 밝혀졌다) .

결국, 최종길은 중정의 각종 불법 수사에도 불구하고 강요된 진술을 하지 아니함으로써 권위주의적 권력행사에 저항하였다 할 것이다.

⑸ 즉 수사 개시부터 강요된 자백에 대한 최종길의 거부행위가 수사관들로 하여금 가혹행위를 하게 하였고, 가혹행위에도 불구하고 자백을 계속 거부한 것이 죽음에 이를 정도의 참혹한 가혹행위를 하게 한 원인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상 권위주의적 통치 또는 군사독재에 항거한 활동의 의미는 유신반대활동을 한 것과 같이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항거 이외에, 이 건과 같이 권위주의적 공권력 행사에 대하여 순응하지 아니함으로써 소극적으로 저항한 행위도 포함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의 기본권을 조직적으로 침해하고 , 권위주의 정부의 정당성 강화를 위하여 조작 기도된 이건 수사에 대하여 자백을 하지 아니하여 그 의도를 달성하지 못하게 한 최종길의 행동은 권위주의 통치에 항거하고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죽음으로 인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더구나 사망 이후에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당시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하여 정치적 사회적 저항의 계기가 되었고, 이후 유신 반대 등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던 점을 감안해 본다면 최종길의 위와 같은 저항행위는 권위주의의 통치에 항거해서 민주헌정 질서를 확립하고 국민의 자유권리를 신장시킨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행위라 할 것이다.

⑹ 한편 최종길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권위주의 통치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저항한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평소 대학교수로서 적극적인 저항활동도 하였고, 교수회의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학생들을 옹호하거나 경찰의 강압적인 연행 등을 반대하였다는 동료 교수들의 진술이 있으나, 위 진술만으로 그와 같은 발언이 민주화운동에 대한 옹호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반대 활동으로서 의도된 것인지를 확정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다.

또 최종길이 그러한 발언을 한 것과 중정에서 최종길을 이 사건 수사 대상으로 삼은 것 사이에 연관성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고, 이 사건 수사 이전의 각종 행적을 민주화운동 관련성 인정의 근거로 삼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으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최종길의 평소 행적과 관계없이도 최종길의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하기에 충분하다.

나. 위법한 공권력의 직·간접적인 행사로 인한 사망 여부에 대한 판단

⑴ 중정 수사결과에 대한 판단

먼저 최종길 교수가 간첩사실을 자백하고 조직을 보호할 목적으로 7층 화장실에서 투신자살 하였다는 당지 중정의 발표는 다음과 같은 근거에 의하여 믿기 어렵다. 그 판단의 근거는,

㈎ 중정에서 발표한 최종길의 자살동기가 명백히 허위로 조작되었음이 드러났다.

㈏ 중정은 최종길이 투신한 장소를 남산분청사의 7층 화장실이라고 발표했으나, 중정이 제시한 근거는 7층 경비원의 진술 및 7층 화장실 소변기의 족적을 찍은 사진 등인데, 당시 경비원의 진술은 허위로 작성된 것임이 드러났고, 화장실 소변기 사진은 족적의 동일성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고, 족적조차 보지 못하였다는 중정 수사관의 진술이 있으므로 믿기 어렵다.(참고인 임금동 중정 7층 경비원, 안흥용 이병정 중정 수사관의 진술)

㈐ 1973년 최종길 사망사건 당시 중정의 감찰실에서 최종길 사건의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최종길이 간첩임을 자백한 사실이 없으며 수사관들이 최종길을 고문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고문한 사실은 은폐하고 마치 최종길이 간첩임을 자백하고 조직을 보호할 목적으로 투신자살을 한 것으로 자살동기를 조작했다.

㈑ 최종길을 간첩혐의 때문에 수사한 것이 아니라 공작의 일환으로 조사에 착수하였음에도 최종길의 사후에 현장검증조서, 긴급 구속장, 압수조서, 피의자신문조서, 신문 보도안 등 허위문서를 만들어 이 사건이 마치 간첩사건의 수사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인 양 은폐·조작을 시도했다.

㈒ 현장검증을 형식적으로 하였으며 사체의 상태는 물론 위치와 자세, 착의 상태 등 현장을 조작하였고, 그에 대한 관련자들의 진술이 일치하지 않는다.

㈓ 중정의 수사관들은 최종길이 유럽거점 대규모간첩단의 일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위 사건 간첩단 피의자들을 조사하면서 최종길과 관련한 어떠한 추궁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발표할 때는 최종길을 이 간첩단의 일원이라고 하면서 허위 사실을 발표했다.

㈔ 이 사건 관련자들이 88년 검찰에서 조사를 받기 전에 검찰에서 진술할 내용과 방향에 대해 사전협의를 함으로써 이 사건의 시간대와 여러 정황에 대해 허위로 진술을 맞춘 사실이 드러났다.

㈕ 담당 수사관들이 최종길의 간첩자백 여부, 7층 조사실 수용여부, 7층 조사실로 이동한 시점과 이유, 사체의 위치와 자세, 투신정황, 최종길의 복장상태 등에 대해 자신이 과거에 한 진술을 수차례 번복하고 있음이 명백하게 입증되므로 수사관들이 이제껏 최종길이 자살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1973년 감찰실의 조사 및 1988년 검찰내사시에 진술한 내용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 중정요원들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던 최종길 사체 사진 및 부검감정서 원부를 빼내려 기도한 것은 증거를 인멸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하다.

㈗ 현장의 사체사진을 감정한 일부 법의학자들이 사체가 추락직후의 모습이 아니라 조작을 위해 옮겨졌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 당시 중정에서 최종길의 유가족에게 거액(3000만 원)의 보상제의를 한 것이 사실로 인정된다.

㈙ 최종길 사망 당시 수사관인 차철권은 사망 다음날 자신이 작성한 것이 분명한 감찰 진술서 및 진술조서(최종길을 고문한 사실 및 간첩사실을 자백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내용이 있음)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최종길을 빰 한 대 때린 사실이 없고 최종길이 간첩을 자백한 것이 맞다고 강변하고 있고, 같은 수사관인 김상원은 현재 미국에 거주하면서 몇차례에 걸친 위원회의 출석 요구 및 위원회 조사관의 현지 출장 면담조차 거절하면서 진술을 완강히 회피하고 있어 있어 두 수사관들의 진술을 모두 믿기 어렵다.

이상 전체적인 상황을 종합하여 판단을 한다면 우선 최종길의 자살을 주장하는 논거는 모두 믿기 어렵고 오히려 최종길에 대한 타살의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최종길이 간첩사실을 자백하고 자살을 한 것이라면 긴급 구속장, 피의자신문조서, 압수 조서 등 송치서류 일체, 부장에게 올리는 보고서, 신문 보도안 등 내부 보고서류 일체, 현장검증조서 등을 허위로 작성할 이유가 없고, 부검의를 중정으로 불러서 압력을 행사할 이유도 없으며, 중정의 수사관들이 부검원장을 강압적으로 제출할 것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살이 명확하다면 최종길을 고문한 사실을 은폐할 이유가 없으며 간첩임을 자백했다는 허위사실을 신문과 방송에 유포할 필요가 없으며 7층 경비원을 시켜 최종길을 보았다고 하라는 허위진술을 시킬 이유도 없다. 이와 같은 은폐와 조작은 조일제 차장보의 재가 하에 5국장 안경상의 묵인과 장송록단장의 지시로 수사 9과의 서철신 과장, 정낙중 계장, 권영진 수사관 그리고 10과의 차철권 등이 공동으로 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⑵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사망에 대한 판단

나아가 최종길이 타살되었다고 볼만한 직접적인 증거로는 공작과장 안흥용 및 수사단장 장송록의 각 진술 및 카미야마 시게타로(上山 滋太郞) 박사의 법의학 소견이 있다.

㈎ 공작과장 안흥용의 진술

"1973. 10. 18. 밤 12시경쯤에 차철권의 추궁소리와 최종길의 비명소리를 들었고 그 이후에 다급하게 화장실 쪽에서 조사실 방향으로 2명 정도가 뛰어가는 발자국소리를 들은 후 약30분에서 1시간 후쯤에 김종한 계장이 자신이 취침하고 있는 조사실로 들어와 7층 비상계단으로 데리고 가 손짓으로 미는 흉내를 내면서 '여기서 최종길을 밀어 버렸어'라고 하여 그 즉시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와 비상출구로부터 약 2미터정도 떨어져 있는 시체를 확인하였던 것으로 타살이 분명하다."

㈏ 수사단장 장송록의 진술

"최종길이 간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간첩이라 발표를 했고 부검사진처럼 심한 고문을 당한 상태에서 7층 화장실뿐만 아니라 그 어디도 제발로 걸어다니는 것은 불가하고, 더구나 걸어다니지 못하는 사람이 화장질 창문을 타고 넘어 자살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고 이미 고문으로 죽었거나 가사상태에서 사고 현장으로 옮겨진 것이 틀림없고, 7층 화장실 창문은 평소에 닫혀 있기 때문에 열고 투신자살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으며 자살하였다면 굳이 송치서류와 보고서 신문보도안 등 일체 서류를 사후에 만들 이유가 없으며 안경용 국장 이하 조사관들이 이구동성으로 18일 오전 10시에 최종길의 신병을 7층으로 옮겼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고 김상원이 사고 직후 현장에서 사고상황을 설명하며 말을 더듬고 몸을 떨고 있어서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직감했으며, 1973년도 감찰 조사를 받을 때 양명률이 밤늦게까지 최종길의 조사를 위해 남아 있었으면서도 일찍 퇴근하여 모른다고 하는 것을 보고 나쁜 놈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1988년도에 검찰 내사 때에도 전화로 사건 설명을 잘해 달라고 하였고, 안흥용의 말대로 최종길이 간첩 자백을 하였다면 전화상으로 보고하지 않고 증거자료를 가지고 직접 찾아왔을 것임에도 그러지 않았으므로 타살로 본다."

㈐ 카미야마 시게타로(上山 滋太郞) 박사의 법의학 소견

최종길의 부검사진 상에 나타나는 왼쪽 족저부의 상처, 전두부 골절, 양팔의 골절 등에 응혈과 혈종이 나타나지 않는 등 다른 상처들과 발생한 시간에 뚜렷한 차이가 나며 이는 명백히 사후 손상에 해당한다. 위와 같은 사후손상은 외표에 손상을 남기지 않고 외력을 가하는 방법으로 최종길을 사망하게 하고 추락으로 위장하기 위하여 사체를 바닥에 던지거나 발바닥에 망치 등으로 외력을 가하여 생긴 것으로 판단된다.

위 수사관들의 각 진술 및 카미야마 시게타로(上山 滋太郞) 박사의 법의학 소견을 종합하면 최종길에 대한 타살은 다음 세 가지 형태 중 하나일 것으로 본다.

① 심한 고문 등으로 인한 최종길이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소생이 불가능해지자 수사관들에 의하여 7층 비상 옥외 계단에서 바닥으로 던져져서 사망하였거나, ② 이미 고문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을 자살로 가장하기 위하여 상당한 높이까지 사체를 운반하여 아래로 던져서 추락시켰거나, ③ 이미 사망한 사람을 바닥에 운반하여 추락으로 인한 사망으로 가장하기 위하여 발바닥에 둔기 등으로 외력을 가한 경우이다.

그러나 위 증거만으로는 타살의 형태를 어느 하나로 특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안흥용의 진술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 보이나 다른 과 수사관이었던 김종한 으로부터 사건 직후에 들은 내용인데 위 김종한이 사망하여 이를 확인하기 어렵고, 장송록의 진술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고 정황들에 대한 사후 판단으로써 자신이 당시 최종길 수사의 주된 책임자이었음에도 이를 회피하기 위한 진술일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어, 위 2명의 진술만으로는 타살의 방법을 일률적으로 특정하기는 어렵다. 또 카미야마 시게타로(上山 滋太郞) 박사의 법의학 소견에 대하여는 다른 국내외 법의학자들은 생전 추락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사망의 원인 및 과정을 단정하기 어렵다.

설령 최종길에 대한 직접적인 타살을 인정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당시 심한 고문 및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모욕과 협박등으로 최종길이 몸과 마음이 황폐해지고 더 이상 고문이 계속되면 간첩이라고 허위자백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에 대하여 죽음으로 항거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하여 순간적으로 스스로 7층에서 뛰어 내려 죽음에 이르렀다고도 추정할 수 있으며 위와같은 경우에도 수사관들의 고문 및 협박이 최종길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봄이 상당하므로 법률상으로 고문치사로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이 사건 진정의 요체는 사망한 최종길이 중정의 발표대로 스스로 투신하여 자살한 것인지, 혹은 수사 받던 중에 고문에 의해 타살된 것인지를 밝혀달라는 데 있다. 위에서 사인에 관해 설명한 바처럼 본 위원회 조사에 의해 타살되었음이 명백하기 때문에 자살하였을 경우를 가정해서 공권력의 개입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자칫 최종길이 자살했을 개연성을 인정하는 듯한 오해를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 기술은 불필요하다고 본다. 김준곤 위원, 안병욱 위원, 이석영 위원 의견)

그러나 위와 같은 여러 가능성 중 어느 한쪽으로 판단이 불가능한 이유는 유력한 목격자이자 당시 보조 수사관인 김상원이 미국에 거주하면서 위원회 조사를 극력 거절하고 있고, 위원회의 조사권한의 한계 및 사건 후 30년에 가까운 시간의 경과 등으로 타살의 방법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결국은 최종길이 중정 수사관들의 고문이라는 위법한 공권력에 의하여 사망하였다고 인정하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⑶ 소결

따라서 최종길은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사망하였으므로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제26조의 규정에서 정하는 구제조치를 취하기로 한다.

다. 고발 및 수사의뢰 조치여부에 관한 판단.
최종길에 대한 고문 및 그로인한 사망에 가담한 차철권, 김상원은 형법 제125조(폭행, 가혹행위), 형법 제259조(상해치사)의 경합범, 변영철은 고문에만 가담하여 형법 제125조(폭행, 가혹행위), 사건 발생후 허위서류 작성에 가담한 조일제, 안경상, 장송록, 서철신, 정낙중, 권영진, 차철권, 김상원 등은 허위공문서작성죄, 동행사죄(형법 제227조, 229조)가 성립하지만 모두가 위 범죄일로부터 형사소송법 제249조에서 정하는 공소시효가 경과되었음이 명백하므로 범죄에 가담한 자에 대하여 고발 및 수사의뢰를 하지는 아니한다.

5. 결론

그러므로 최종길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인정하여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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