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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몰라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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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몰라도 좋다

유시민의 시사카페 <17>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 이후 옥탑방이 졸지에 ‘정치용어’가 되어버렸다. 그 바람에 잠시 상념에 잠긴 이가 하나 둘이 아닐 것이다. 나도 15년 전 신혼살림을 차렸던 서울 신림10동 열세 평짜리 빨간 벽돌집을 새삼 머리 속에 그려보게 되었다. 아래층을 우리 부부에게 전세로 내준 집주인은 옥상 물탱크 옆에 작은 옥탑방을 만들었다. 2층의 열세 평 공간이 네 식구 살기에는 좁았고, 고3 아들에게 따로 공부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불법행위임은 말할 나위도 없었지만, 인심 좋은 달동네라 시비 거는 이웃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했던 주인집 아들은 그 옥탑방에서 공부도 했지만, 틈틈이 또래 친구들을 불러다 뒹굴고 낄낄대는 데도 그만큼 열심이었다. 햇살이 좋은 일요일 낮에 아래층 새댁이 올라와 빨래 너는 모양을 몰래 훔쳐보는 재미도 꽤 쏠쏠했으리라. 이제 삼십대 중반의 어엿한 가장이 되어 있을 그 친구도 난데없는 옥탑방 논란을 보면서 옛날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신림동의 옥탑방에 관한 기억은 그런 밝은 색조로 남아 있다.

신길동 신풍시장 뒷골목 연립주택 3층 옥상에도 더러 드나든 옥탑방이 있었다. 거기에는 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여성 노동자가 혼자 살았다. 전두환 정권의 노조 말살 정책에 맞서 싸우다 징역을 살기도 했던 그이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채 썰어 볶은 감자를 반찬으로 내놓곤 했다. 검정 프라이팬 위로 함께 볶은 당근의 붉은 색이 얼핏얼핏 비치던 그이의 감자볶음은 예쁜 추억의 편린이다. 하지만 신길동의 그 옥탑방은 방 주인의 신산스럽기 짝이 없었던 과거, 그리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던 불투명한 미래와 더불어 무척 어둡고 아린 기억으로 여태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옥탑방은 콘크리트 옥상바닥에 얹혀 탑처럼 삐죽이 솟아있기 때문에 여름에는 무지하게 덥고 겨울에 사정없이 춥다. 화장실과 부엌이 딸려 있지 않은 경우도 많다. 거리의 소음이 라이브 연주처럼 그대로 밀려들기 때문에 편한 잠을 자기도 어렵다. 옥탑방은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달리 피할 길이 없어 받아들이는 냉엄한 현실이다. 그들이 나날이 맛보아야 하는 애환의 상징이다. 그러나 거기서도 사람들은 인연을 맺고 사랑을 만든다. 아이를 낳고 소박한 꿈을 키운다. 옥탑방은 빛과 어둠이, 현실의 가난과 미래의 희망이 뒤섞여 존재하는 장소다.

옥탑방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연립주택 또는 다세대주택 위에는 옥탑방이 있지만 아래에는 ‘반지하방’이 있다. 연탄을 때던 시절 가스 중독으로 수많은 청춘이 목숨을 잃었던 곳이다. 옥탑방은 이름만이라도 낭만적이다. 그러나 장마철에는 벽지 위로 곰팡이가 피어오르고 장판 아래에 물기가 흥건하게 고이는 반지하방은 이름까지도 음습하다.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도 가난한 한국인들은 변함없이 이런 곳에 살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옥탑방을 아는 것은 아니다. 옥탑방이 무엇인지 누구나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옥탑방을 모른다는 것이 자랑삼을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 자격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들이 서민의 권익을 부르짖고 서민적 삶의 현장을 체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비록 그 자신은 서민이 아니라 하더라도 서민의 일상을 가까이 가서 보고 잠깐이라도 겪어보면 좋은 정치를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자 곁에는 심기를 살피는 데 능한 예스맨과 아부꾼이 꾀기 마련이다. 노무현과 이회창 두 후보 가운데서 대통령이 나온다고 보면 두 사람은 ‘확률 50%의 대통령’이다. 절반의 권력도 당연히 아부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그 수많은 아부꾼들 가운데 서민은 없다. 권력자가 예스맨들에 둘러싸여 밤낮 거창한 ‘국사(國事)’만 논하게 되면 서민의 삶은 정치적 관심 영역 밖으로 멀리 밀려나고 만다.

두 후보에게 권한다. ‘체험! 삶의 현장’을 더 적극적으로 전개하라고. ‘서민 향한 일편단심’이야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괜찮다. 서민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치쇼라 하더라도 좋다. 직접 보면 더 잘 알 수 있고, 알면 더 잘할 수 있는 법. 어디 대통령이라고 예외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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