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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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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79>

이방간 세력을 제거하다

대간과 형조 등 3성(省)에서는 합동으로 이방간을 베도록 청했습니다.
임금이 하윤에게 지시해 대간 형조와 함께 박포를 국문하게 했습니다. 박포가 말한 내막은 이랬습니다.

지난해 동짓날 박포가 이방간의 집에 가서 장기를 두었습니다. 그날 마침 비가 오자 박포는 말했습니다.
“날씨가 온화하지 못하니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이방간이 거사를 일으키기 며칠 전 초저녁에 서북쪽 하늘에 붉은 기운이 있어서 이튿날 박포는 또 이방간의 집에 가서 말했습니다.
“하늘에 요기(妖氣)가 있으니 조심해서 처신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처신해야겠나?”
“군사를 맡지 말고 출입을 삼가며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해서 전 왕조 왕들의 예(例)와 같이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방간이 그 다음을 묻자 박포가 말했습니다.
“태백(太伯), 중옹(仲雍)이 야만의 땅으로 도망쳐 들어갔듯이 하는 것이 그 다음입니다.”
태백, 중옹은 주나라 문왕의 큰아버지들로, 후사를 양보하려고 남쪽 땅으로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그 다음을 묻자 박포가 말했습니다.
“정안공은 군사가 강하고 사람들이 따르며 또 상당후의 아우를 사위로 삼았는데 공의 군사는 약하고 위태해 아침 이슬과 같으니, 먼저 쳐서 제거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에 박포에게 곤장을 치고, 얽어 부채질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박포가 말했습니다.
“내가 정안공을 따라 정사(定社)의 공을 함께 이루었는데도 얼마 안 돼 나를 지방으로 쫓아냈으니, 지금 나를 써주더라도 어찌 장래를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방간에게 공을 세우면 함께 길이 부귀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3성에서 이방간을 처벌하라고 글을 올리니, 임금이 보고 통곡했습니다.
중추원 부사 이침은 도망쳤다가 스스로 옥으로 나왔습니다.

3성이 연복사에 모이니, 3성의 간사를 불러 말했습니다.
“어제 3성에서 올린 것이 비록 법에 맞으나, 내가 어찌 차마 골육지친(骨肉之親)을 형륙(刑戮)에 처하겠는가? 지금 들으니 3성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다. 이를 다시 청하려는 것으로 생각돼 미리 금지하니, 모두 그리 알라.”

“이방간이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여 형제를 해치려고 했습니다. 주상께서 처음에 도승지를 보내 못하게 했는데 듣지 않고, 또 이지실을 보내 못하게 했는데도 따르지 않고 군사를 일으키기에 이르렀으니, 죄가 막중합니다. 마땅히 큰 법으로 조치해야 합니다.”

“내가 차라리 해를 당할지언정, 어찌 차마 동복 아우를 죽음에 이르게 하겠는가? 다시 거론하지 말라.”

박포는 관직을 삭탈하고 곤장 1백 대를 쳐 청해(靑海)로 귀양보내고, 박만, 이옥은 변방 고을에 귀양보냈습니다.

3성에서 이방간과 공모한 자들의 죄상을 경중을 가려 아뢰었습니다. 박포는 이미 삭직해 곤장을 치고 귀양보냈으며 두 차례의 공신이니 다시 극형을 가할 수 없어 집을 몰수하고 자손의 벼슬길을 막도록 했습니다.

전 소윤 민원공은 불온한 말을 했으니 법대로 참형에 처하도록 했으며, 검교 문하부 참찬 최용소는 삭직하고 곤장 60 대를 때려 먼 지방에 부처하게 했고, 나머지 관련자들도 각기 매를 때리고 지방에 부처하게 했습니다.

강유신, 장사미(張思美), 이군실(李君實), 정승길(鄭升吉)은 모두 이방간에게 힘을 다한 자들인데, 세자가 즉위한 뒤에 모두 임용했습니다.

이날 이방간의 아들 이맹종이 도망중에 있다가 대궐에 나오니, 임금이 불러 보고 울며 말했습니다.
“네 아비가 본심을 잃었으니, 네가 돌아가 모셔라.”
그러고는 돌려보냈습니다.

3성이 합동으로 다시 박포, 이침, 강인부, 이백온의 처벌을 청했습니다. 글을 올리니, 도평의사사에 내려 의논하게 했습니다. 도평의사사에서 아뢰었습니다.
“담당 부서에서 말한 것이 매우 도리에 합당합니다. 공신들만은 전하의 결정을 얻어야 합니다.”

이에 박포의 공신 녹권을 회수하도록 지시하고, 이침은 삭직해 곤장 60 대를 더하고, 강인부, 이백온은 삭직했습니다.

3성에서 박포, 강인부의 처벌을 다시 청하니, 임금이 말했습니다.
“박포는 죄가 있더라도 공신이니 극형에 처할 수 없다. 강인부는 일찍이 현비의 능을 지켰기 때문에 태상왕의 뜻에 따라 경감한 것이다.”

그러고는 이산(尼山, 논산)으로 귀양보냈습니다. 강인부는 석 달 뒤 위협당해 따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울과 지방에 편한 대로 거처케 하려다가 사헌부에서 반대하자 지방에 귀양보냈습니다.

중추원 동지사 장담은 이방간과 관련됐지만 두 차례의 공신이라 파직만 시키도록 했는데, 이때 죽었습니다. 장담은 일찍이 중이었다가 머리를 기르고 태상왕의 서형(庶兄) 이원계(李元桂)의 딸에게 장가들었습니다. 이방간이 난을 일으키고 그 집 문을 지나다가 억지로 함께 데려갔는데, 난이 평정되고 옥에 갇혀 신문받다가 장형(杖刑)으로 죽었습니다. 양안(良安)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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