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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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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68>

태상왕을 달래는 임금

5월 들어 문하부는 태상왕과의 갈등 관계가 딱했던지 글을 올려 태상왕에 대한 문안을 부지런히 하라고 건의합니다.

그러나 태상왕 궁전의 일 보는 사람들을 정리하고 절제사로 하여금 번갈아 호위하게 하며 중과 노예의 무리는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라는 것은, 겉으로는 태상왕을 위하는 체하면서 주변을 정리하자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금은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왕에게 가 잔치를 베풀었는데, 저녁 때가 되어서 끝마쳤습니다. 임금이 태상왕 앞에 나아가고 물러나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고, 태상왕도 임금을 그렇게 대했다고 합니다. 태상왕이 도승지 이문화를 시켜 주상에게 명령을 전했습니다.

“아비가 죽은 뒤에 자식이 그 물건을 전해 받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지만, 어찌 부자가 직접 서로 주고받으며 친애의 정을 다하는 것만 같겠느냐?”

즉시 띠고 있던 황금 띠를 풀어 내려주니, 임금이 받고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며 띠었습니다. 이방원이 감격해 울고, 좌우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공 후들이 번갈아 일어나 술잔을 올리니, 태상왕이 먼저 임금에게 드리게 했습니다. 임금이 술잔마다 모두 비우고, 태상왕도 비웠습니다. 의안공 이화와 전 한성부 판사 이거이가 일어나 춤을 추었습니다. 임금이 궁으로 돌아와 종친과 공 후에게 옷 한 벌씩을 내려주었습니다.

얼마 뒤에 임금이 다시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왕에게 나아가 술잔을 올렸습니다. 공 후들과 청성백 심덕부, 문하부 시랑찬성사 성석린, 청천백(淸川伯) 이거인 등이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성석린이 아뢰었습니다.

“옛날에 당나라 태종이 고조에게 잔을 올리고 일어나 춤추니, 고조도 일어나 춤추었습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일어나 춤을 추소서.”

임금이 곧 일어나 춤추니, 태상왕도 일어나 춤추었습니다. 이거인에게 수정(水精)띠 한 개를 내려주었습니다.

임금은 도읍 문제가 정해지지 못했다며 공 후들을 태상왕에게 보내 지시를 받도록 해서 태상왕을 받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태상왕은 임금이 흥천사에서 신덕왕후의 제삿날 재(齋)를 베푸는데도 따로 광명사에 가 재를 베풀고 낙산사(洛山寺)에 가서 능엄 법회를 베풀고 이튿날 돌아오는 등 불사에 더욱 매달렸습니다.

임금은 10월 들어 드디어 태상왕 궁전의 호위를 없애고 보화고(保和庫)를 태상왕의 개인 창고로 삼았습니다.

임금이 공 후들과 내상(內相) 이거이, 이무, 조영무를 불러 말했습니다.

“어제 밤에 하늘의 꾸짖음이 너무 심하니, 무슨 일이 천심을 어긋나게 했는지 모르겠다. 부왕께서 내게 사람을 보내 ‘나의 호위는 가두어 지키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시니, 내가 항상 마음이 아프다. 부왕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나와 경들이 부끄럽지 않은가? 지금 모든 것을 지시하신 대로 호위를 철폐하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그러고는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습니다. 공 후와 재상들이 모두 지시대로 따르겠다고 대답하니, 박영문을 시켜 이 사실을 태상왕에게 고했습니다. 태상왕이 매우 기뻐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왕은 성품이 본디 순수하고 깊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더니, 지금 또 내게 이렇게 효도하는구나.”

며칠 뒤 태상왕의 생일에는 도승지 이문화를 보내 안팎 옷감과 옷을 바쳤습니다. 임금이 술을 올리려다가 설사병이 나서 그만두었는데, 태상왕이 듣고 말했습니다.

“오늘 오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빨리 병을 치료하라.”

그러고는 이문화에게 말총갓 한 개와 비단옷 한 벌을 내려주었습니다. 임금이 공 후들을 시켜 술을 올리려 했으나 태상왕이 받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도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왕에게 가 잔치를 베푸니, 태상왕이 매우 기뻐했습니다. 임금이 일어나 춤을 추니, 태상왕도 일어나 춤을 추었습니다. 심덕부, 성석린이 참석했는데, 밤중이 되어서 마쳤습니다.

태상왕이 내시 이광과 함승복(咸承福)이 자꾸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말하자 임금은 이광을 나주(羅州)에 귀양보내고 함승복을 순군부 옥에 가두었습니다.

운신이 자유로워진 태상왕은 새 도읍에 거둥했습니다. 흥천사의 사리전이 완성된 것을 보고 또 수륙재를 베풀어 죽은 부모와 현비, 그리고 죽은 아들들과 사위, 고려의 왕씨에게도 제사지냈습니다.

앞서 태상왕이 새 도읍에 가려 하니, 문하부에서 태상왕의 행차를 중지시키라고 글을 올렸습니다. 임금은 보류하고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천수사(天水寺) 북쪽 들에 거둥해 태상왕의 행차를 전송하려 했으나, 술이 깨지 않아 못 나갔습니다. 문하부에서 대궐에 들어와 청했습니다.
“전하께서 술에 취해 힘드시지만 억지로라도 나가셔야 합니다.”

임금은 지신사 이문화를 시켜 명령을 전했습니다.
“경들의 말이 진실로 예법에 맞는다. 그러나 어제 술을 올릴 때 부왕께서 아주 즐거워하시는 게 다행스러워 내가 감히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일어나려 해도 피곤함을 이길 수가 없다. 또 부왕께서 내가 매우 피곤할 것을 아시고 나오지 말라고 하셨으니, 경들은 이상하게 생각지 말라.”

도평의사사와 각 부서마다 한 명씩 숭인문 밖까지 모시고 전송하게 했습니다.
태상왕이 돌아올 때 임금은 백관을 거느리고 장단(長湍)에 거둥해 마중했습니다. 임금이 절제사들과 갑사들만 데리고 가려 하자 문하부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의장(儀仗)을 갖추어 가라고 해 그대로 따랐습니다.

임금은 장단 나루에 머물러 태상왕을 임시 처소에서 뵙고, 풍악을 울리며 술을 올렸습니다. 임금이 태상왕의 장막 처소에 나가 문안하니, 태상왕이 임금으로 하여금 먼저 가게 했습니다. 임금이 행차를 움직여 초천(椒川) 가에 머물면서 기다렸습니다.

곧 태상왕이 도착했습니다. 임금이 태상왕에게 용둔(龍屯) 들에서 잔치를 베풀려 했으나, 태상왕이 밤중에 바로 서울로 들어갔습니다. 임금이 새벽에 행차를 움직여 뒤따라 태상왕 궁전에 나갔으나 뵙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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