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으로 옮겨가기 전인 1399년 설날 임금이 종친을 거느리고 태상왕에게 인사하려 했지만, 태상왕은 수륙재 때문에 재계중이라며 하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안팎 옷감 한 벌만 드리고 돌아왔습니다.
태상왕은 이때 개인 재산으로 대장경을 인쇄하고 있었는데, 경상도 감사에게 지시해 해인사(海印寺)에서 불경을 인쇄하는 중들을 공양하게 했습니다. 태상왕은 동북면에 저축한 콩과 조 5백40 섬을 단주(端州), 길주(吉州) 두 고을 창고에 들이게 하고, 해인사 근방 여러 고을의 쌀 콩과 그 수량대로 바꾸게 해서 불경을 인쇄했습니다.
태상왕은 연초에 소도군(昭悼君) 이방번의 옛집으로 옮겨가려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가지 못했습니다. 소도군은 1398년 쿠데타 때 죽은 이성계의 아들 무안군 이방번에게 새로 내린 군호(君號)입니다.
대간이 이방번의 옛집에 어찌 거처하실 수 있겠느냐고 말씀올리니, 임금이 도승지 이문화를 시켜 그 글을 태상왕에게 전달해 아뢰게 했습니다. 태상왕이 듣지 않자 이번에는 도평의사사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말씀올렸습니다.
“지금 태상왕께서 무안군의 옛집으로 옮겨 거처하려 하시니, 각급 신료들로 놀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모두들 태상왕께서 개인 집에 나가 거처하시고 전하께서 궁궐 안에 편안히 계시는 것이 실로 옳지 못하다고 합니다. 전날 대간이 아뢴 바가 지극히 자세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우선 편한 대로 태상왕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효도하려 하지 마시고, 대간이 아뢴 바를 충분히 받아들이소서. 태상왕의 옮겨가시려는 마음을 그만두게 하시고 뜻을 받들며 예(禮)를 다해 극진하고 온전하게 큰 효도를 하소서.”
임금이 도승지 이문화를 시켜 그 글을 태상왕에게 아뢰니, 태상왕이 화가 나 말했습니다.
“호령진퇴(號令進退)는 임금의 한마디에 있는 것이다. 만일 ‘늙으신 아버지의 뜻을 내가 어길 수 없다’고 한다면, 대간과 백관으로 누가 안 된다고 하겠는가?”
다음날 대간이 대궐에 들어와 다시 청해 마지않으니, 임금이 내시 박영문을 시켜 태상왕에게 고했습니다.
“부왕께서 만일 개인 집으로 나가서 거처하시면 나라 사람들이 모두 효도를 다하지 못해 나가 거처하게 했다고 할 것이니, 제가 이 때문에 깊이 부끄러워합니다.”
태상왕이 그 말에 감동해 옮겨가는 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고 북문을 열어 왕래만 통하게 했습니다.
태상왕은 개성으로 옮겨가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던 데다가 출입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보살재(菩薩齋)를 베풀기 위해 금강산 유점사(楡岾寺)로 떠나려 하자 임금이 내시 박영문을 보내 청했습니다.
“지난해에 홍수와 가뭄으로 백성들이 농사를 망쳐 기근이 들었고 게다가 지금 첫여름이어서 씨뿌리기가 한창인데, 행차가 거둥하시면 비록 수행을 간단하게 하시더라도 폐단이 또한 작지 않아 농사에 방해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농사가 한가한 때를 기다리소서.”
태상왕이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 말했습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해 말하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말하는 것이니, 어찌 생각 없이 떠날 수 있겠는가? 내가 가면 정말 폐단이 있을 것이니 그만둬야겠다.”
박영문이 돌아와 고하니, 임금이 기뻐 옷 한 벌을 내려주었습니다.
태상왕은 이때 말하자면 반(半)연금 상태였습니다. 궁문을 지키는 군사를 철수시키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태상왕은 어느 날 새벽 밝기 전에 시중 윤환(尹桓)의 옛집으로 옮겨갔습니다.
실록은 태상왕이 일찍이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아내와 아들을 잃고 지금 환도했으니 실로 도성 사람에게 부끄럽다고 말했다며, 출입을 꼭 밝기 전에 한 것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둘러댔습니다. 태상왕이 하루는 좌우의 측근 신하와 내시를 거느리고 관음굴에 거둥해 능엄(楞嚴) 법회를 베풀고 이튿날 돌아왔으며, 또 단기(單騎)로 관음굴에 거둥했다가 평주 온천에 가려 했으나 가지 못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태상왕이 행차하려 하자, 임금이 듣고 놀랍고 두려워 내시 박영문을 보내 청했습니다.
“부왕께서 미리 가실 곳을 지시하지 않으시고 갑자기 온천에 가시면 나라 사람들이 가신 곳을 몰라 두려워하고 실망할 것입니다. 제발 궁으로 돌아오셔서 날을 가려 행차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않자 문하부에서 말씀올렸습니다.
“신들이 가만히 들으니, 이달 26일 밤중에 태상왕께서 단기로 관음굴에 거둥하셨다가 온천으로 가시려 했다 하니, 지금 농사철에 그 폐단이 작지 않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정성으로 움직이고 도리로 아뢰어 그 행차를 중지하도록 청하셔서 신민의 소망에 부응토록 하소서. 또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명령이 한 곳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태상왕께서 부리시는 수레와 수행원들은 마땅히 전하께 아뢰고 전하께서 담당 부서에 지시해 준비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내시 이광이 태상왕의 명령을 출납하면서 전하께 아뢰지 않고 또 백관으로 하여금 가는 곳을 알지 못하게 했으니, 진실로 나라의 큰 원칙에 맞지 않습니다. 청컨대 이광을 담당 부서에 내려 그 까닭을 국문하고 엄하게 징계해 본을 보이시고, 앞으로는 태상왕이 부리시는 수레와 수행원은 모두 전하께 아뢰도록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윤허했으나, 이광은 불문에 부쳤습니다. 태상왕의 좌우에서 이광을 문제삼는 글이 올라갔다는 말을 듣고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이날 저녁에 태상왕이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백운사(白雲寺)의 늙은 중 신강(信剛)이 알현하니, 태상왕이 탄식해 말했습니다.
“방번, 방석이 모두 죽었다. 내가 잊고자 하나 잊을 수가 없구나.”
신강이 대답했습니다.
“제발 성상께서는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불행과 성상의 상심(傷心)은 모두 자업자득입니다.”
임금은 서운관에 지시해 태상왕이 온천에 거둥할 길일(吉日)을 골라 보고토록 했습니다. 임금이 술을 올리려 하자, 태상왕이 듣고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자식이 아비에게 상을 차리는 것이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내가 목욕하고 돌아온 뒤에 하는 것이 좋겠다.”
태상왕은 사위인 청원후 심종, 손자(이방간의 아들)인 의령후(義寧侯) 이맹종(李孟宗), 중추 조인경(趙仁瓊), 장사정 등을 데리고 평주 온천에 갔습니다. 임금이 공 후들을 보내 들판의 임시 처소에서 잔치를 베풀려 하니, 태상왕이 물리쳤습니다.
임금이 또 내시 박영문을 보냈습니다. 박영문이 오기 전에 태상왕은 궁녀 뒷바라지만 하도록 했는데, 박영문을 시켜 임금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일찍이 잔치를 베풀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 왜 이러느냐?”
임금은 태상왕이 온천에 가 있는 동안 이방원과 사위인 상당후 이저(李佇)를 보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태상왕이 온천에서 돌아오자 임금이 종친과 갑사만을 거느리고 서보통(西普通)으로 마중나갔으나, 태상왕은 샛길로 궁에 돌아왔습니다. 임금이 말을 달려와 들어가 알현했습니다.
태상왕이 흥천사 사리전 공사가 더디다고 말하자 임금이 내시 박영문을 보내 공사를 독려하게 했습니다. 문하부는 이 거둥이 못마땅했던지, 임금의 거둥은 반드시 의장과 시위를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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