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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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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65>

격구를 즐기는 임금

정종은 한동안 경연에 열심이더니 해를 넘기면서부터는 격구(擊毬) 쪽에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격구는 말을 타고 공을 치는 놀이로, 고려 때 성행하던 것이었습니다. 실록에는 태조가 젊었을 때 격구를 잘 했다며 이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려 때 단오절(端午節)이 되면 젊은 무관(武官)과 선비 자제들을 뽑아 격구의 기예를 익혔는데, 그 날은 큰 길에 용과 봉황을 그린 장막 전각을 설치하고 길 복판에 구문(毬門)을 세웁니다. 임금은 장막에 나가 이를 구경하는데, 잔치를 베풀고 여악(女樂)을 벌려 놓으며 신하들도 모두 따릅니다.

여자들도 길 양쪽에 장막을 매고 비단으로 장식하는데, 이를 화채구(畫彩毬)라 부릅니다. 구경꾼이 담을 이룹니다. 격구를 하는 사람은 의복 장식을 화려하게 하는데, 다투어 사치를 숭상해 말안장 한 개 값이 중산층 열 집 재산과 맞먹었다고 합니다.

두 대열로 나누어 양쪽에 갈라서고, 기생 한 사람이 공을 잡고 전각 앞에서 노래합니다.

뜰 가득 퉁소와 북 벌여 놓고 모여 공이 치는데
실 매단 장대, 붉은 그물이 모두 머리를 드누나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을 모두 음악에 맞춥니다. 공을 길 복판에 던지면, 양쪽 대열에서 모두 앞을 다투어 말을 달려 나옵니다. 맞힌 사람이 이를 차지하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물러가 섭니다.

친 공이 문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적고 문에 지나가는 사람은 열에 두셋 정도여서, 대부분은 중도 탈락입니다. 만약 문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같은 대열의 사람들이 즉시 모두 말에서 내려 전각 앞에 나아가 두 번 절하고 사례합니다.

태조도 젊었을 때 그 경기에 참가해 빼어난 기술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그런 솜씨인지라 임금이 된 뒤에도 처음 1~2 년간은 가끔 대궐 뜰에서 격구를 했습니다. 유만수, 정희계나 사돈인 귀의군 왕우 등이 상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환갑이 가까워지는 나이 때문인지 격구 대신 척석놀이(擲石戱.돌을 던지는 편싸움)를 구경하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단오 날이면 으레 척석놀이를 구경한 것은 물론이고 성 안의 척석놀이꾼을 모집해 척석군(擲石軍)이라 이름붙였습니다.

1398년 단오날에는 임금이 궁성 남문에 거둥해 절제사 조온이 거느린 척석군과 중추원 판사 이근이 거느린 여러 부대 군사들간의 대결을 구경했는데, 해가 질 때까지 해서 죽고 상한 사람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정종은 1399년 1월 어느 날 경연에 나가 강관(講官)에게 말했습니다.
“과인이 병이 있어 손발이 저리고 아프니, 때때로 격구를 해서 몸을 움직이고 기운을 통하게 하려 한다.”

경연 지사 조박이 말했습니다.
“기운을 통하게 하는 놀이라면 그만두시라 할 수는 없지만, 청컨대 내시나 간사한 소인배들과는 함께 하지 마소서.”

이렇게 운을 뗀 임금은 자주 대궐 뜰에서 격구를 했습니다. 전 문하부 참지 도흥, 전 중추원 부사 유운 및 종친 등과 함께였습니다.

하루는 경연에 나갔는데, 공 후들이 내시와 더불어 대궐 뜰에서 격구를 하느라고 떠드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사관 이경생(李敬生)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격구 같은 것도 역사 책에 쓰는가?”
“임금의 거동은 모두 쓰는데, 하물며 격구하는 것이겠습니까?”
“내가 전 시대 임금과 신하의 행사(行事)한 자취를 보려 하니, ‘고려사’를 가져다 바치도록 하라.”

춘추관 지사 조박이 ‘고려사’를 바쳤습니다. 조박은 격구 놀이가 기운을 통하자는 것뿐이니 과도하게 하지는 말라고 진언했습니다. 임금이 조박에게 일렀습니다.

“과인은 본래 병이 있어서, 임금이 되기 전부터 밤이면 잡념이 많이 생겨 자지 못하고 새벽에야 잠이 들어 항상 늦게 일어났다. 그래서 숙부들과 형제들이 나더러 게으르다고 했다. 즉위한 이래로 마음속으로 경계하고 삼가서 병이 있음을 느끼지 못했는데, 요즘 다시 병이 도져 마음과 기운이 어둡고 나른하며 피부가 날로 거칠어지고 있다. 또 내가 무인(武人) 집에서 자란 탓에 산을 타고 물가에서 자며 말을 달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니, 오래 틀어박혀 나가지 않으면 꼭 병이 생긴다. 그래서 격구 놀이라도 해서 기운과 몸을 기르는 것일 따름이다.”

조박은 예예 소리만 했다고 합니다.
임금이 도흥, 유운 등을 불러 자주 격구를 하자 문하부에서 현안(懸案) 몇 가지를 건의하는 가운데 격구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격구 놀이는 망한 원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법도를 잃고 황음(荒淫)에 빠져 하던 것이며,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하다가 그것을 보고 온 도흥, 유운, 김사행 등이 건국 초기에 태조에게 “임금이 궁중에 거처해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반드시 병이 생기는 법인데, 몸을 움직이는 데는 격구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진언하고 그 놀이를 해 총애를 얻었다며, 이미 정도전 일파 숙청 때 처벌받은 김사행 이외의 도흥, 유운 등도 처벌하고 격구 놀이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이 읽다가 화가 폭발해, 좌간의 안노생을 불러 꾸짖었습니다.
“언관(言官)의 직책으로 곧은 말을 하는 것은 좋지만, 내 문제를 가지고 부왕에게 허물을 돌리는 것이 옳으냐?”

글을 보류해 내려주지 않고 간사인 기거주 박수기에게 업무를 보지 말라고 지시했다가 대사헌 조박이 낭사의 극간(極諫)은 그 직책이라고 말하자 다시 업무를 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이후에도 유운, 도흥과 조온, 정남진, 조진 등을 불러 날마다 격구를 했으며, 심지어는 병이 났다가도 회복만 되면 바로 격구 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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