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임금이 된 정종에게는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임금의 공부인 경연(經筵)입니다. 부실한 정종 시대의 실록에 경연 관련 기사는 상당히 많은 것입니다.
경연은 임금의 주요 덕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임금인 태조도 신하들로부터 경연에 대한 채근을 받았지만, 원래 무인인데다 나이도 많고 해서 자신은 물론이고 신하들도 꼭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그저 신하 입장에서 하라고 권하고 임금은 임금대로 하겠다고 받아들이는 시늉이 그쳤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태조 때는 경연 기사가 거의 없습니다. 즉위 직후에 경연을 열라고 청하고 받아들이는 한 차례 '의례(儀禮)'를 거친 후 대사성 유경으로부터 '대학연의'를 배웠다는 기록이 한두 번 나오고 1393~94년에 승지 한상경, 송문중에게 '대학연의'를 배웠다는 기록이 몇 번 나오는 정도입니다.
그러다가 한참 건너뛰어 1395년에는 예조 의랑 정혼과 교서관 소감 장지도(張志道)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교정해 바치도록 했고, 1397년에는 좌산기상시 조서에게 지시해 '홍범(洪範)'편을 써서 바치게 해서 좌승지 이문화에게 강론하게 했다는 기록이 전부입니다.
정종은 즉위하자마자 바로 이조 전서 이첨과 우간의 조용, 전 선주(善州) 지사 정이오(鄭以吾) 등에게 지시해 경전과 역사에 실린 임금의 마음가짐과 정치에 관계된 구절들을 엮어 바치게 했습니다. 또 4서(書)를 보겠다며 경연 지사인 정당문학 하윤과 겸(兼)대사헌 조박에게 귀절에 점을 찍어 바치라고 지시합니다.
그러고는 시강관(侍講官) 배중륜(裵仲倫)과 경연 지사 조박 등으로부터 '정관정요'와 '대학''논어(論語)' 등을 배웠습니다.
지시한 대로 좌정승 조준, 겸(兼)대사헌 조박, 정당문학 하윤, 중추원 학사 이첨, 좌간의대부 조용, 봉상시 소경 정이오 등이 '사서절요(四書切要)'를 지어 바치자, 임금은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정종의 공부 모습 몇 장면 볼까요?
임금이 경연에 앉아 강론하면서 유관에게 '황녕(荒寧)'의 뜻을 묻자 유관이 대답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여색(女色)에 미치고 사냥에 미친다'고 했으니, '미친다(荒)'는 것은 임금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바입니다."
"그렇다면 사냥도 할 수 없단 말인가?"
"봄사냥(春蒐), 여름사냥(夏苗), 가을사냥(秋선), 겨울사냥(冬狩)은 옛 제도입니다. 다만 종묘에 제물을 바치기 위한 것이지, 사냥을 좋아한 것이 아닐 따름입니다. 뒷세상의 임금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버려두어 멋대로 사냥을 하면서 각처로 돌아다니며 놀아 절도가 없으니,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임금이 옳다고 말했습니다. 이서가 나아가 말했습니다.
"임금은 물건을 가지고 노는 일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물건을 가지고 노는 일에 빠지면 자기 마음을 잃게 될 것입니다. 경연을 열고 유신(儒臣)을 불러 성현의 도(道)를 강론해 밝히는 것은 바로 훌륭한 옛 임금의 정치를 따르려는 것뿐입니다. 글귀를 따서 풍월이나 읊조리는 것은 마음을 잃게 되는 것이어서, 임금의 정치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임금이 옳게 여겼습니다.
경연 지사 조박이 '논어'를 강의 올리다가 '예전 일 그대로 하면 어떤가(仍舊貫如之何)'라는 대목에 이르러 말했습니다.
"이것은 임금에게 백성들을 괴롭히는 토목 공사를 중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토목 공사는 이미 중지했다. 충청도 감사 이지(李至)가 궁성에 띠 덮는 일을 중지하자고 청해 내가 생각해보았다. 전국의 백성들이 가난해 양식을 싸 가지고 올 수도 없고 나라에는 저축한 것이 없어 공급할 수도 없으니, 덮을 띠를 수송할 때 그 폐해가 작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백성들을 해치는 것이다. 지금 일체의 토목 공사를 모두 중지해야 할 텐데, 하물며 궁성에 띠 덮는 일이겠는가? 그래서 그 청을 따랐다."
"전하의 이 말씀이 참으로 우리 백성들의 복입니다."
어느 날 경연에 나간 임금이 말했습니다.
"고황제(高皇帝)는 하루에 두 번씩 조회를 보고 만 가지 일을 모두 직접 결단했다. 그러나 영웅과 공신을 의심하고 꺼려 남옥(藍玉)의 패거리다 호유용(胡惟庸)의 패거리다 해서 모두 죽였으니,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경연 지사 이서와 좌간의 조용 등이 대답했습니다.
"고황제가 부지런하고 검소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을 어진이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듣고 결단해 임금으로서 신하의 일을 했으니,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눈 뜻에 크게 어긋납니다.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저울과 추로 달면서 서류를 처리한 것과 대개 비슷합니다."
임금이 옳다고 말했습니다. 교서감 소감 배중륜이 말했습니다.
"신이 예전에 중국에서 여러 왕자들의 글씨를 보았는데, 훌륭했습니다."
조용이 말했습니다.
"임금은 오로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것이 필요하며, 글씨 쓰는 것은 숭상할 바가 못 됩니다."
임금이 옳게 여기고는 말했습니다.
"임금은 마땅히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소중히 해야 한다."
임금이 '논어'의 요약본을 모두 읽고 나니 조박이 아뢰었습니다.
"'논어' 한 책은 모두 성인의 말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 날마다 익히고 외우셔서 성인을 본받으시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어렵지 않은데, 하물며 한 나라겠습니까? 옛날에 송나라 정승 조보(趙普)가 평소에 읽던 책이 오직 한 질(帙)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수가 없다가 죽은 뒤에야 알게 됐는데, 바로 '논어'였습니다. 요즘 전하께서 늘 격구하는 것을 낙으로 삼으시는데, 임금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므로 가지는 것이 커서 잠시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소홀히 할 수 없거늘 하물며 유희겠습니까?"
정종은 1399년 설날 평양부 윤 성석린이 바친 '의기도(欹器圖)'를 벽에 걸도록 지시했습니다. 경연 지사 이서가 "가득 차도 넘치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해 높은 지위는 지속하기 어려움을 경계하니, 임금이 기뻐했습니다.
또 경연에서 중추원 학사 이첨이 '논어'의 '극기복례(克己復禮)' 대목을 강론한 뒤 정자(程子)의 네 가지 경구(警句)를 좌우에 써 두어 보기 편하게 해야겠다고 말해 임금이 윤허했습니다.
정종은 경연에 사관(史官)을 배석시키지 않다가 문하부에서 거듭 글을 올려 청하자 1399년 초부터 배석을 허락했습니다. 경연 지사 조박이 나와 말했습니다.
"임금이 두려워할 것은 하늘이요, 사필(史筆)입니다. 하늘은 푸르고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사관은 임금의 좋고 나쁜 점을 기록해 만세에 남기니, 두렵지 않습니까?"
임금이 옳게 여겼습니다.
조박은 일찍 대궐에 나와 무신(武臣)과 장기를 두다가, 강론할 때가 되어 책을 펴고 읽었으나 그 글의 귀절도 떼어 읽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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