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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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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62>

쿠테타 세력 요직을 독차지

조선의 두 번째 임금으로 오른 정종은 즉시 쿠데타의 주역인 아우 이방원에게 인사권을 맡은 상서사의 판사를 겸하도록 했습니다. 이방원은 이듬해 2월까지 이 직책을 겸했습니다.

이방원의 장인 민제(閔霽)는 삼사 우복야, 이방원의 동서 조박(趙璞)은 겸 대사헌, 사돈 이거이(李居易)는 문하부 참찬 겸 의흥삼군부 중군 동지절제사에 임명했으며, 그 밖에 조영무(趙英茂), 조온(趙溫), 박포(朴苞), 마천목(馬天牧)을 문하부와 군직에 임명하고 이숙번(李叔蕃)을 우부승지로 삼아 쿠데타 세력을 요직에 등용했습니다.

임금은 장조카인 봉녕후 이복근을 제릉에 보내 왕위에 오른 것을 고하게 했습니다. 8일부터 재계하고 14일에 정식 행차를 갖추어 종묘에 가 장막을 치고 머물렀으며, 15일에 임금이 직접 강신제(降神祭)를 지내 왕위에 오른 일을 고했습니다. 이를 마치자 장막에 나와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고, 정전으로 돌아와 교지를 반포했습니다.

공신들은 벌써부터 공 다툼을 시작했습니다. 박포는 쿠데타 후 자신의 공로가 다른 신하들보다 못하지 않다고 생각해 불만을 품고 불평하면서 정탁에게 말했습니다.

"이무가 정사공신(定社功臣)의 반열에 들었지만, 공로가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하고 또 이랬다저랬다 해서 믿을 수 없소."

중추원 판사 김노가 듣고 조영무에게 말해 이방원에게 알렸습니다.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화가 나 정탁을 청주로, 박포를 죽주(竹州)로 귀양보냈습니다.

앞서 이무는 어느 편에도 들지 않고 변고를 관망하다가 거취를 정해 결국 공신에 끼여 사람들의 비난을 샀습니다.

임금이 드디어 이방원과 함께 정사공신의 등급을 의논하고 도승지 이문화에게 지시해 교지를 전했습니다. 정사공신을 1등과 2등으로 나누고 각기 포상 내용을 확정했습니다. 가족 봉작과 하인들의 임용 특혜는 개국공신과 같았으며, 땅과 노비도 이에 준해 지급했습니다.

<표>

임금은 정사공신 29 명을 거느리고 개국공신 때처럼 함께 맹약(盟約)했습니다. 정사공신들이 근정전에서 임금에게 잔치를 베풀었으며, 임금도 정사공신을 근정전에 모아 잔치를 베풀고 각기 교서와 녹권을 내려주었습니다.

정도전 세력에 대한 숙청도 계속됐습니다. 사헌부에서 정도전, 남은, 심효생, 장지화, 이근 등 주범급의 재산을 몰수하기를 청했는데, 이방원이 임금에게 말해 과전만 회수하게 했습니다.

강계권, 한규, 정신의, 정진, 강택, 이조, 오몽을, 이수, 신극공, 장윤화, 홍유룡, 신극온(辛克溫), 유은지(柳隱之), 유연지(柳衍之), 박기(朴耆), 강중경(康仲卿), 김주 등은 직첩을 빼앗고 땅과 노비를 몰수했으며, 나머지 40여 명도 지방에 부처됐습니다. 이 가운데 오몽을은 나중에 간관의 건의에 따라 참형을 당했고, 정도전의 아들 정진은 수군으로 내쫓겼습니다.

유만수의 아들인 유은지, 유연지를 숨겼던 전 평리 왕흥(王興)은 이듬해 봄에 탄핵됐으나 윤허받지 못했는데, 백관이 대궐 문 밖에 반열을 지어 서 있는데 말을 타고 지나쳐 곧장 대궐 문에 이르렀다는 이유로 기어코 개성에 안치시켰습니다.

특히 내시 김사행이 참형을 당한 데 이어, 내시 조순도 그 인맥이라 해서 참형을 당했습니다. 조순은 고려 때도 중추부에 있으면서 순군부 만호를 겸임해 중앙과 지방에 권세를 부려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고, 지금 다시 정도전, 남은 등에게 붙어 함께 나쁜 짓을 하고 안팎에서 서로 호응했으며 정종이 즉위할 때는 불온한 말까지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시 이득분도 길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봄에 풀려났습니다. 처음에 서울과 지방의 편한 곳에 살게 하자 사헌부에서 태상왕에게 불사(佛事)를 행하도록 권해 창고를 비게 만든 자라며 처벌을 청했습니다. 임금이 화를 버럭 내며 그 글을 땅에 던지고 간사를 나오게 해서 꾸짖었습니다.

"이득분이 이런 죄를 지었으면 왜 일찍 다스리지 않고 내가 석방하고 용서한 뒤에서야 처벌을 청하는가? 이것은 나를 욕보이는 것이다."
글을 보류하고 내려보내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임금이 사헌부의 글을 들어 보이며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헌부가 나를 욕보인 것이다. 태워버리려는데, 어떤가?"
공 후들과 재상들이 모두 말했습니다.
"사헌부의 글이 지나쳤습니다."

대사헌 조박이 휴가 갔다가 비로소 나와서 극력 청하니, 임금이 할 수없이 그 글을 내려주고 지방의 편한 곳에 살도록만 지시했습니다.

지방 여러 진(鎭)에 포진하고 있던 남은의 세력들도 모두 쫓겨났습니다. 그의 심복으로 지목된 전 합포진(合浦鎭) 첨절제사 안빈(安贇)과 친척들인 전 이산진(伊山鎭) 첨절제사 신유정, 전 강주진(江州鎭) 첨절제사 박영(朴齡), 전 삼척진(三陟鎭) 첨절제사 이신(李伸), 전 간성진(杆城鎭) 동첨절제사 한천동(韓天童) 등이 모두 지방에 부처된 것입니다.

남은의 형 남재는 의령(宜寧)으로 쫓겨갔습니다.
앞서 이방원은 남재를 살리려고 자기 집에 두게 했는데, 그 어머니가 쿠데타 때 죽었다고 생각해 통곡했습니다. 남재가 수염을 뽑아 보내니,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재(在)는 죽지 않았구나."

일이 마무리된 뒤에 어머니를 과주(果州)의 농장에서 만나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남은의 추종자들의 죄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남재가 두려워 변장을 하고 도망쳤습니다. 대장군 마천목이 그를 완산 노상에서 만나 그곳 관청에 잡아 두고 와서 조정에 알리자 고향으로 보내라고 지시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상대 세력을 쫓아냈어도 쿠데타 초기의 정권은 불안정하게 마련입니다. 쿠데타 두어 달 후인 10월 말에는 좌정승 조준의 첩이었던 기생 국화(菊花)는 조준이 딴 마음을 품고 있다는 말을 내뱉었다가 국문을 받고 한강에 던져졌습니다.

조사 결과는 버림받은 데 대한 앙심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준은 경기좌 우도 도통사 사직을 청했습니다. 지휘관 도장과 거느린 군사 명부를 올리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즉시 군사 명부를 처남인 월성군(月城君) 김수(金需)에게 옮겨 주었습니다.

그 한 달 뒤에는 쿠데타 때 죽은 강씨 소생 왕자 이방번의 종 박두언(朴豆彦) 등이 난리를 일으키려다가 복주(伏誅)됐습니다. 박두언의 모의에 전 낭장 김성부(金成富)의 종 가라적(加羅赤)이 관계했다가 우부승지 이숙번을 통해 이방원에게 알린 것입니다.

박두언은 수레로 찢어 죽이고, 함께 모의한 조두언(曹豆彦) 등 4 명을 목베었으며, 박송(朴松) 등 2 명은 사실을 알면서 자수하지 않아 곤장 1백 대를 쳐서 수군에 편입시켰습니다. 가라적에게는 쌀 콩 각 10 섬과 옷 한 벌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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