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7편(篇) 2백61장(章) 3만4천6백85자(字)에 달하는 대저(大著)입니다. 그 내용도 제자백가의 사상을 두루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정된 우리의 고전강독 시간으로는 더 이상 다룰 수가 없습니다. 아쉽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몇가지 구절을 소개하고 '맹자'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음 장은 맹자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맹자'의 대부분은 치세(治世)에 관한 도도한 논설임에 비하여 이 장은 매우 성찰적(省察的)이면서 매우 엄정(嚴正)함을 느끼게 합니다.
먼저 본문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孟子曰 孔子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難爲言
觀水有術 必觀其瀾 日月有明 容光必照焉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 (盡心 上)
小魯(소로) : 노나라가 작다고 하다. 小는 동사.
觀於海者(관어해자) : 바다를 본 사람.
難爲水(난위수) : 물을 말하기 어렵다. 물로 여기기 어렵다. 爲는 謂.
難爲言(난위언) : 言에 대하여 말하기 어렵다. 言이라고 여기기 어렵다.
瀾(란) ; 큰 물결. 水中大波.
容光(용광) : 빛이 겨우 들어 갈 수 있는 작은 구멍. (容膝)
成章(성장) : 章을 이룸. 어떤 경지에 오름.
文章이라고 할 때 文은 무늬 하나 하나, 章은 많은 무늬들로 이루어진 전체.
達(달) : 통달함(足於此而通於彼也). 벼슬에 나아감. 仕進. 官達.
전체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공자께서 동산에 오르시어 노(魯)나라가 작다고 하시고 태산(泰山)에 오르시어 천하가 작다고 하셨다. 바다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물(水)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言)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에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이다.)
일월(日月)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가득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道)에 뜻을 둔 이상 경지(境地)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이 장의 전체 기조는 아까 말한 것처럼 성찰적이면서도 엄정합니다.
동산(東山)은 노(魯)나라 동쪽에 있는 산이고. 태산은 여러분도 잘 아는 중국의 영산(靈山)입니다. 오악의 으뜸(五岳之首)으로서 1백여명이 넘는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여기에 올라 하늘에 봉선(封禪)을 고한 산입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 ."
양사언의 시조에 나오는 태산이 바로 이 산입니다. 동산과 태산의 예를 들어 맹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학문을 닦고 품성의 기르는 일의 가없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난위수(難爲水)와 난위언(難爲言)의 해석에 있어서 이견이 없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爲'를 'become'으로 해석하여 '물이기 어렵다' '물이라고 여기기 어렵다'고 해석합니다.
물론 문법적으로 무리가 없고 그 뜻도 좋습니다. 대해(大海)를 본 사람은 (큰 호수나 큰 강 등) 엔간한 물은 바다에 비할 바가 못되고 따라서 물이라고 하기가 어렵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바다를 본 사람의 이미지가 상당히 오만하게 느껴집니다. '바다'라는 것은 큰 깨달음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더구나 작은 것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 취할 태도가 못되지요.
난위언(難爲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 언(言)은 단순한 말의 의미가 아니라 학문(學問)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문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은 모든 언(言)에 대하여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다를 본 사람이나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웬만한 물이나 이론(理論)에 대하여 그것을 물이나 이론으로 쳐주기 어렵다고 하는 해석은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맹자의 뜻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노자(老子)의 지자불박 박자부지(知者不博 博者不知)와 통하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관어해자 난위수(觀於海者 難爲水)는 내가 좋아하는 구절로 서예전(書藝展)에 출품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의 일입니다만 도록(圖錄)을 만드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내가 달아 놓은 설명문(caption)을 교정하였습니다.
어떻게 바꾸었는가 하면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을 말하기 어렵다,'로 바꾸어놓았어요. 깜짝 놀라서 다시 바로 잡았습니다만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였던 것이지요. 세태(世態)의 일면을 보는 듯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월(日月)은 모든 틈새도 다 비춘다는 것은 한 점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불영과부진(不盈科不進)은 우리가 특히 명심하여야 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科)는 여러분들의 학과(學科)라고 하는 경우의 그 과(科)입니다. 원래 의미는 '구덩이'입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捷徑)에 연연해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正道)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너뛰었다는 뜻이지요.
불성장부달(不成章不達) 역시 불영과부진(不盈科不進)과 같은 의미입니다.
장(章)은 수많은 무늬(文)들로 이루어진 한 폭의 비단과 같은 것입니다.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경지(境地)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않았으면 치인(治人)의 장(場)으로 나아가면 안 되는 것이지요.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맹자는 공자를 잇고 있다는 일반적 통설과 달리 공자에 대한 최대의 이단(異端)이라는 상반된 견해도 있습니다. 물론 맹자는 공자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제자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맹자는 자사(子思)의 문인에게서 학문을 배운 것으로 사마천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사 역시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아니지요.
자사는 증자(曾子)의 문인으로 되어 있지만, 막상 증자는 공자 최만년(最晩年)에 입학한 제자로서 공자보다 46세 연하여서 공자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였음이 지적됩니다.
더구나 증자의 아버지인 증석(曾晳)은 '논어'에 매우 부당하게 삽입되어 있는데 필시 후대에 조작된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맹자는 무리하게 공자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강의에서 이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는 나도 여러분도 양쪽 모두가 적합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이러한 맹자에 대한 상반된 견해는 공자와 맹자의 시대적 차이에서 상당부분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맹자 당시는 진(秦)에서는 법가인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책을 실시하였고, 초(楚)와 위(魏)에서는 오기(吳起)를 등용하여 전쟁으로 적국의 땅을 빼앗았으며, 제(齊)의 위왕(威旺)과 선왕(宣王)은 병가(兵家)인 손자(孫子)와 전기(田忌)를 등용하는 등 당시는 합종연횡(合縱連橫)의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면서 오로지 전쟁을 능사로 여기는 그야말로 전국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비록 맹자가 공자와 마찬가지로 요순(堯舜)과 하(夏) 은(殷) 주(周) 3대 성왕들의 덕치(德治)를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강조점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차별화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엄격한 수기(修己)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등문공편(騰文公篇)>에서 맹자는 왕량(王良)의 비타협적인 자부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진(晋)의 대부인 조간자(趙簡子)가 천하제일의 마부인 왕량(王良)으로 하여금 임금의 총신(寵臣)인 해(亥)의 사냥을 위하여 마차를 몰게 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한 마리도 맞추지 못하고 돌아온 해(亥)가 왕량을 일컬어 천하의 형편없는 마부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왕량이 다시 한번 마차를 몰게 해달라고 강청하여 허락을 받고 마차를 몰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해(亥)가 하루아침에 열 마리를 쏘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해는 왕량을 일컬어 천하제일의 마부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조간자가 총신 해를 위하여 앞으로도 마차를 몰겠느냐고 왕량에게 묻자 왕량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사냥의 법도대로 마차를 몰았더니 하루종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법도를 어기고 궤우(詭遇)하게 하였더니 하루아침에 열 마리를 잡고서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무리 그가 권세가(權勢家)라 하더라도 마차를 몰 수가 없다는 고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궤우(詭遇)란 것은 아마 짐승을 옆에서 쏘게 해주는(橫而射之) 것으로 부정한 방법으로 사냥하는 것(不正而與禽遇)을 의미하는가 봅니다. 맹자는 왕량의 그 법도를 잃지 않으려는(不失其馳)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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