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이 군기시 직장(直長) 김겸(金謙)을 시켜 무기고를 열고 갑옷과 창을 꺼내 화통군 1백여 명에게 주니, 군대의 형세가 조금 나아졌습니다.
갑사 신용봉(申龍鳳)이 대궐에 들어가서 이방원의 말을 전했습니다.
"흥안군과 무안군은 각기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의안군 이하는 왜 나오지 않습니까?"
왕자들이 서로 눈짓만 하면서 말이 없었습니다. 다시 독촉하니 이화 이하 모두가 나왔습니다. 심종은 궁성 수문(水門)으로 도망쳐 나갔고, 정신의만이 한참 머뭇거리다가 독촉을 받고서야 나왔습니다. 도당에서 이방석을 내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했습니다.
"이미 결재를 했으니, 나가도 해가 없겠지."
이방석이 울면서 하직했습니다. 세자빈인 현빈이 옷자락을 잡으며 통곡하니, 이방석이 옷을 떨치고 나왔습니다. 처음에 이방석을 먼 지방에 안치하기로 했는데, 궁성 서문을 나오자 이거이, 이백경, 조박 등이 도당에 의논하고 사람을 시켜 도중에서 죽이게 했습니다.
도당에서 또 이방번을 내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방번에게 일렀습니다.
"세자는 어쩔 수 없지만 너는 먼 지방에 안치할 뿐이다."
이방번이 궁성 남문을 나가려 하는데, 이방원이 말에서 내려 문안에 들어와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남은 등이 우리를 제거하면 너도 결국 면할 수가 없어 내가 부른 것인데, 너는 왜 따르지 않았느냐? 지금 비록 지방에 나가더라도 얼마 안 가 꼭 돌아올 것이다. 잘 가거라. 잘 가거라."
통진(通津, 김포)에 안치하려고 양화도(楊花渡)를 건너 도승(渡丞) 숙소에 유숙케 했는데, 이방간이 이백경 등과 함께 다시 도당에 의논하고 사람을 시켜 죽이게 했습니다.
이방원은 이방석, 이방번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몰래 이숙번에게 말했습니다.
"유만수조차도 내가 보전하려 했는데, 하물며 형제겠는가? 이거이 부자가 내게는 알리지도 않고서 도당에게만 의논하고 내 형제를 죽였다. 지금 인심이 안정되지 않아 내가 속으로 참으면서 감히 성낸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니, 그대는 이 말을 입밖에 내지 말라."
군사들이 변중량, 노석주와 남지 등을 잡아 가지고 나왔습니다. 변중량이 이방원을 우러러보면서 말했습니다.
"제가 벌써 몇 해 전부터 공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이방원이 말했습니다.
"저 입도 고깃덩이다."
남지는 남은의 아우로, 이때 우군 절제사였습니다. 모두 순군부 옥에 가두었다가 뒤에 길에서 목을 베었습니다.
이제가 나오니, 이방원이 이제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일렀습니다.
임금이 마침내 이방과를 세자로 책봉하고 교지를 내렸습니다.
"맏이로 적통을 세우는 것은 만세의 일반적인 도리며, 맏아들을 성(城)으로 삼는 것이 과인의 바람이다. 다만 네 아비인 내가 일찍이 나라를 세운 뒤 맏이를 버리고 어린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삼았으니, 이는 내가 사랑에 빠져 밝지 못한 허물일 뿐만 아니라 정도전, 남은 등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만약 초(楚)나라에서 작은아들을 사랑했던 일을 경계로 삼아 상도로써 조정에서 간했더라면 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정도전 같은 무리는 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세우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요전에 정도전, 남은, 심효생, 장지화 등이 몰래 반역을 도모해 근본을 흔들었는데, 다행히 천지와 종묘 사직의 도움에 힘입어 죄인이 복주되고 왕실이 다시 편안해졌다. 방석은 화(禍)의 빌미니 국도(國都)에 남겨둘 수 없어 동쪽 변방으로 내쫓았다. 내가 이미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또 백관의 청을 받아들여 이에 너를 세워 왕세자로 삼는다. 아아! 그 덕을 밝혀 조상을 욕되게 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우리 사직을 진무(鎭撫)하라."
이에 이문화와 김육에게 지시해 나가서 세자를 알현케 했습니다. 세자가 이문화를 불러 말했습니다.
"안에 호위할 사람이 없으니, 그대가 빨리 대궐 안으로 도로 들어가라."
이문화가 즉시 도로 들어가니, 조순이 세자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시녀와 대궐 종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은 모두 밖으로 나가라."
이문화가 다시 나오니, 세자가 말했습니다.
"그대는 왜 나오는가?"
이문화가 그 까닭을 상세히 아뢰자 세자가 말했습니다.
"그대를 이르는 것이 아니다. 빨리 도로 들어가 호위하라."
또 상장군 이부로 하여금 안에 들어가 호위하게 했습니다. 임금이 조순에게 지시해 세자에게 갓과 안장 갖춘 말을 내려주자, 세자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가 집으로 돌아가니, 옹주가 이제에게 일렀습니다.
"내가 공과 함께 정안군의 집에 가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듣지 않았는데, 저녁때 군사들이 뒤따라와 죽였습니다. 이방원이 듣고 놀라서 즉시 진무 전흥(田興)을 불러 말했습니다.
"흥안군이 죽었으니 노비들이 도망쳐 흩어질 것이다. 그대가 군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흥안군 집에 가서 시체를 거두게 하고, 노비들에게 만약 도망치면 나중에 무겁게 처벌할 것이라고 일러라."
전흥이 그 집에 이르러 계집종을 시켜 들어가 알리도록 했습니다.
"놀라지 마시오! 나는 정안군의 진무입니다."
그러고는 시체를 염습(斂襲)하는 모든 일을 이방원의 명령대로 하니, 옹주가 감격해 울었습니다.
남은은 도망쳐 성(城)의 수문으로 나가 성밖의 포막(圃幕)에 숨었습니다. 최운, 하경 등이 부축해 잠시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남은이 순군부 옥에 나가려 했습니다. 최운 등이 말리자 남은이 말했습니다.
"정도전은 남에게 미움받아 주륙됐지만, 나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고는 스스로 순군부 문 밖에 갔다가 참형을 당했습니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뒤 하경과 최운은 섬기는 주인에 충성했다 해서 모두 발탁 임용됐습니다.
이방원이 왕자들과 함께 감순청(監巡廳) 앞에 장막을 치고 사흘 동안 모여서 숙직했으며, 그 후에는 삼군부에 들어가 숙직했고, 세자가 내선(內禪)을 받은 후 각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남은의 형인 정당문학 남재는 일찍이 명령을 받들어 송악에서 제사를 올리다가 변고 소식을 듣고 스스로 돌아와 왕자들을 알현했으나, 동생과 같이 처벌하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방원이 말했습니다.
"남재는 평소에 남은과 마음을 같이하지 않았으니 관련시켜 처벌할 수 없다. 내 집으로 보내라."
임금이 이에 교지를 내렸습니다.
"1396년 6월 11일, 황제가 내사(內使) 양첩목(楊帖木), 송패라(宋孛羅), 왕예(王禮)와 상보시(尙寶寺) 승(丞) 우우 등 관원을 보내 정도전을 오도록 독촉하는 유시(諭示)를 내렸는데, 이때 정도전이 마침 복창을 앓아 일어날 수 없었다. 또 1397년 4월 17일 예부의 공문으로 삼가 받든 황제의 명령에는 '지금 조선 국왕이 임용한 문인 정도전이란 사람은 왕을 도우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왕이 만약 깨닫지 못한다면 이 사람이 반드시 화(禍)의 근원이 될 따름이다'라고 하셨다. 삼가 친절하신 깨우침을 받고 보내려 했으나, 정도전의 병이 낫지 않아 그대로 있었다. 이제 병이 나았으므로 큰아들 방과가 내게 알리고 정도전을 중국에 보내야겠다고 말했다. 정도전이 그 말에 원한을 품고 삼군부 절제사 남은과 막내아들 방석의 장인인 심효생, 인척 장지화 등과 몰래 모의해 막내아들 방석을 끼고 방과 등을 해치려 했다. 사직이 거의 기울어질 뻔했으나, 오히려 천지와 조상의 도움에 힘입어 이미 죄인을 베었다. 지금 장남 방과는 성품과 행실이 순수하고 조심스러우며 뜻은 충 효에 있으니 마땅히 세자가 될 만하다. 또 각급 신하들이 일치된 의견으로 청하니, 1398년 8월 27일에 종묘에 고하고 세워서 후사(後嗣)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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