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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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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57>

아비와 아우를 몰아내다 ②

초경(初更) 무렵에 사람이 안에서 나와 말했습니다.
"임금께서 병이 위급해 피병(避病)하고자 하니, 왕자들은 빨리 안으로 들어오되 수행원은 모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오."

이화, 심종, 이제가 먼저 나가서 뜰에 서고, 이방원은 두 형과 매부 이백경 등과 함께 문에 잠시 서 있다가 가만히 말했습니다.
"옛 제도에 궁중의 여러 문에는 밤에 반드시 등불을 밝혔는데, 지금 보니 궁문에 등불이 없소."

더럭 의심이 커졌습니다. 이화와 이제, 심종은 먼저 안으로 들어갔으나, 이방원은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서쪽 행랑 문밖으로 나와서 뒷간에 들어가 앉아 한참 동안 생각했습니다. 형들이 달려나오면서 이방원을 두 번이나 부르니, 이방원이 말했습니다.

"형님들, 왜 큰소리로 부르십니까?"
그러고는 일어서서 양쪽 소매를 치면서 말했습니다.
"형세가 어쩔 수 없습니다."

즉시 말을 달려 궁성 서문으로 나갔습니다. 두 형과 이백경이 모두 달아났는데, 이백경만 이방원의 말을 따라오고 두 형은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방원이 마천목(馬天牧)을 시켜 이방번을 불러 말했습니다.

"나와서 나를 따르기 바란다. 종국엔 저들이 너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방번은 안 행랑 방에 누웠다가 마천목을 보고 일어나 앉아서 다 듣고는 도로 누워버렸습니다.

이방번을 쫓아다니는 무리는 모두 활 쏘고 말 타기만 힘쓰는 무뢰배들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얼토당토않게 세자를 바꾸려고 꾀해, 자신들이 이미 중궁에 선을 대 세자를 이방번으로 바꾸는 왕명이 곧 내리게 될 것이라고 이방번에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나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청하자 이방번이 그 말을 믿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방원은 그들이 서로 용납하지 못할 것이라며 이방번을 불렀으나 따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방원은 자기 집 동구(洞口)의 군영(軍營) 앞길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이숙번을 불렀습니다. 이숙번은 장사 두 사람을 거느리고 갑옷 차림으로 나왔으며, 이방의, 이백경과 이방간 부자도 말을 얻어 탔습니다. 또 이거이, 조영무, 신극례, 서익(徐益), 문빈(文彬), 심귀령(沈龜齡) 등이 있었는데, 모두 이방원과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때 민무구, 민무질까지 모두 모였으나, 기병(騎兵)은 겨우 10 명, 보졸(步卒)은 겨우 9 명이었습니다. 이에 부인이 준비해둔 철창(鐵槍)을 꺼내 절반으로 나누어 군사에게 주었습니다. 여러 군(君)의 수행원들과 각 사람의 노복 10여 명은 모두 막대기를 들었으며, 소근만이 칼을 들었습니다.

이방원이 달려가다 둑소(纛所) 북쪽 길에 이르러 이숙번을 불러 말했습니다.
"오늘 일은 어찌하면 되겠는가?"

이숙번이 대답했습니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군호(軍號)를 내소서."
이방원은 '산성(山城)'이란 두 글자로 정하고는 삼군부 문 앞에 이르러 상황을 주시했습니다.

이방석 등은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싸우려 했습니다. 예빈시 소경 봉원량(奉元良)을 시켜 궁 남문에 올라가 군사 수를 살피게 했는데, 광화문(光化門)에서 남산(南山)까지 무장 기병이 꽉 찼으므로 이방석 등이 두려워 감히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귀신이 도왔다고 했습니다.

이방원이 다시 이숙번을 불러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이숙번이 대답했습니다.
"간당(姦黨)이 모인 곳에 가서 군사로써 포위하고 불을 질러 나오는 사람은 바로 죽이면 될 것입니다."

2경 무렵 송현을 지나는데, 이숙번이 말을 달려와 말했습니다.
"이 작은 골목 안이 남은의 첩 집입니다."

이방원이 말을 멈추고 먼저 보졸과 소근 등 10여 명으로 하여금 그 집을 둘러싸게 했습니다. 안장 갖춘 말 몇 필이 문 밖에 있고 노복은 모두 잠들었는데, 정도전과 남은 등은 등불을 밝히고 모여 앉아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소근 등이 문을 엿보고 들어가지 않았는데, 갑자기 화살 세 개가 잇달아 지붕 기와에 떨어져 소리가 났습니다. 소근 등이 도로 동구로 나와 화살이 어디서 왔는가 물으니, 이숙번이 말했습니다.
"내가 쏘았다."

소근 등으로 하여금 도로 들어가 그 집을 둘러싸고 이웃집 세 곳에 불을 지르게 했습니다. 정도전 등은 모두 도망쳐 숨었으나, 심효생, 이근, 장지화 등은 모두 피살됐습니다. 정도전이 도망쳐 이웃의 전 판사 민부(閔富)의 집으로 들어가니, 민부가 알렸습니다.
"배가 불룩한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

이방원은 그 사람이 정도전임을 알고 소근 등 네 명을 시켜 잡게 했습니다. 정도전은 침실 안에 숨어 있었습니다. 소근 등이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지르자, 작은 칼을 가진 정도전이 걷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 나왔습니다. 소근 등이 칼을 버리라고 소리치니, 정도전이 칼을 던지고 문 밖에 나와서 말했습니다.

"제발 죽이지 마시오. 한마디만 하고 죽게 해주시오."
소근 등이 끌어내 이방원의 말 앞으로 가니, 정도전이 말했습니다.
"예전에 공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이번에도 살려주시오."

예전이란 1392년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이방원이 말했습니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었으면서도 도리어 부족하단 말이냐? 어찌 이렇게 악할 수가 있느냐?"
그러고는 목을 베게 했습니다.

이에 앞서 이방원의 부인이 스스로 이방원이 있는 곳에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하려고 걸어 나오는 것을 이방원의 휘하 군사들이 극력 말린 참이었는데, 종 김부개(金夫介)가 정도전의 갓과 칼을 가지고 오니 부인이 그제서야 돌아왔습니다.

정도전은 아들이 넷 있었습니다. 정유(鄭游)와 정영(鄭泳)은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구원하러 가다가 유격병에게 살해되고, 정담(鄭湛)은 집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앞서 정담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일은 정안군에게 부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도전이 말했습니다.
"내가 이미 고려를 배반했는데, 지금 또 이편을 배반하고 저편에 붙는다면 사람들이 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

이무는 문밖으로 나오다 흐르는 화살을 맞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무다."
보졸이 죽이려 하니, 이방원이 죽이지 말라고 말하고는 그에게 말을 주었습니다.

남은은 수행원 하경(河景), 최운(崔沄) 등을 데리고 도망쳐 숨었으며, 이직은 지붕에 올라가 노복인 척 불 끄는 시늉을 하고 도망쳐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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