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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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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78>

제7강 맹자(孟子)-6

징역살이를 10여 년쯤 하게 되면 얼굴만 봐도 죄명(罪名)과 형기(刑期)를 정확하게 맞추게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성깔이나 학력, 직업까지 맞출 수 있게 됩니다.

감옥의 인간관계라는 것이 도시의 인간관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요. 하루 24시간, 1년 3백65일을 몇 년 동안 같은 감방에서 지내다 보면 자연히 그 사람의 역사(歷史)를 알게 됩니다.

감방은 사람에 대한 이해방식을 매우 입체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입체적 이해방식은 사람에 대한 판단을 매우 정확하게 만들어 줍니다. 나 자신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한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출소하고 난 이후에 사회에서 내가 그런 ‘능력’을 자주 사용하는 곳이 바로 지하철입니다. 저는 꼭 앉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앉을 수 있어요. 누가 어디서 내릴 건지 정확히 짚어낼 수 있거든요.

거짓말 같지요? 물론 사람이 너무 많지 않아서 앉아 있는 사람을 내가 선택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매우 부럽지요? 여러분들도 연습하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이대역(梨大驛)에서 내릴 사람과 서울역에서 내릴 사람은 구별이 어렵지 않지요? 그런 쉬운 문제부터 시작하여 꾸준히 경험을 쌓아 가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창 밖을 자주 내다본다고 해서 곧 내릴 사람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눈감고 있다고 해서 종점까지 가는 사람이라고 포기해서도 안 되지요. 매우 종합적인 판단력을 길러야 합니다.

사람의 인상, 옷차림, 소지품, 그리고 각 전철역의 사회, 문화적 특성은 물론이고 현재시간에 이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유에 대해서까지 생각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나는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언제든지 앉을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앉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몹시 피곤하기도 하고 2시간 강의를 앞두고 있어서 전철 속에서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신도림 역에서 내릴 사람을 골라 그 앞에 섰습니다.

정확하게 신도림 역에서 그 사람이 일어나더군요. 그래서 마악 앉으려고 하는 순간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 사람 옆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재빨리 그 자리로 옮겨 앉고 자기 자리에는 자기 앞에 서 있던 친구를 끌어다 앉히는 거였어요. 거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거지요.

나는 실력(?)이 있기 때문에 엇비슷이 두 사람 걸치기도 하는 법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의 정면에 서서 그 좌석에 대한 확실한 연고권(緣故權)을 주변에 선언(?)해 두었던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하였습니다. 내 주변에는 나와 경쟁상대가 될 만한 나이든 사람도 없었거든요. 태무심으로 있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지요.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어요. 그 앞에 선 채로 나는 매우 착찹한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여자와 내가 아무 관계도 없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만날 일이 없기 때문이지요. 아무 관계가 없었고 앞으로도 무슨 관계가 있을 리가 없지요.

지하철은 평균 20분 정도를 승차(乘車)한다고 합니다. 전철을 동승(同乘)하고 있기는 하지만 평균 10정거장 이내에 서로 헤어지는 우연하고도 일시적인 군집(群集)일 뿐입니다.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持續性)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가 사단(四端)의 하나로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치(恥)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20분을 초과하지 않는 일시적 군집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정서입니다. 언제 다시 볼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피차 신경 쓸 일이 없습니다. 소매치기나 폭행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무관심과 냉담함을 도시(都市)문화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밀집해 있는 도시라는 물리적 공간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물리적 공간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야기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시문화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형식입니다. 인류 5천년 역사에서 고대 노예제사회와 자본주의사회가 도시문화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그처럼 비인간화되는 정도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사회는 노예제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냉혹합니다. 물론 노예제도란 그 자체가 억압적 제도임이 사실이지만, 관계 그 자체가 소멸된 구조는 아니지요.

더구나 그리스-로마의 경우, 일부 광산노예나 겔리선의 노예와 같은 노예노동을 오히려 특수한 경우이며 오늘날의 경찰, 행정, 교육 등을 노예계급이 담당하였지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외거노비(外居奴婢)는 물론이고 가내노비(家內奴婢)의 경우 매우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의 인간관계는 외견상으로 볼 때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입니다. 그리고 매우 광범하고 열려있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사회는 상품사회(商品社會)입니다. 상품사회라는 것은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가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교환이라는 틀에 담기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交換價値)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교환(商品交換)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제도입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라 하더라도 전체적인 사회구성(社會構成)에 있어서 전자본주의(前資本主義) 부문(部門)도 온존하고 있으며 비자본주의(非資本主義) 부문도 물론 존재합니다. 이러한 부문에 주목하고 이 부문을 진지(陣地)로 만들어나가는 과제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자체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전자본주의, 비자본주의 부문이 공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사회란 사회의 일반적 부문에 있어서의 인간관계가 일회적(一回的)인 화폐관계(貨幣關係)로 획일화되어 있는 사회임입니다.

일회적 화폐관계로 전락한 인간관계는 인간관계가 소멸된 상태이며, 인간관계가 황폐화된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람이 타자화(他者化)되어 있는 상태이며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지요. 지하철에서 자리를 빼앗긴 작은 사건(?)이란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것은 자본주의사회의 인간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하철 이야기 하나 더 하지요. 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깎듯이 예우합니다. 노인이 타면 얼른 일어나 자리로 안내하고, 반면에 노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어쩌다 미처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가는 그 자리에서 꾸중을 듣는다고 합니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들려준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어요. “이 지하철을 저 노인들이 만들었지 않습니까?”라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한 젊은이한테 물어봤죠. 이 지하철을 만든 이가 바로 저 노인들인데 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느냐고요. 그랬더니 그들의 답변 또한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어요. “자기가 월급 받으려고 만들었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 참으로 충격적인 대답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모스크바의 지하철이건 서울의 지하철이건 젊은이들이 만들지는 않았지요. 노인들이 만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의 젊은이와 서울의 젊은이가 판이한 대답을 하는 까닭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신도림역에서 횡령(?)당한 좌석의 이야기는 동시대의 횡적인 인간관계의 실상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모스크바의 젊은이와는 판이한 우리나라 젊은이의 대답은 인간관계가 세대간에서 어떻게 단절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화(例話)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대간의 관계가 그만큼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사회의 인간관계는 종횡(縱橫)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성이 사회의 속성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고,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부정부패 이후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점이 맹자의 곡속장을 통하여 반성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맹자는 제 선왕(齊詵王)이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한 사실을 들어 제 선왕에게서 보민(保民)의 덕(德)과 천하통일(天下統一)의 자질을 보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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