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6년에 중국 황제에게 올린 글 문제로 한 차례 홍역을 치렀지만, 1397년에도 다시 같은 문제가 터졌습니다.
이해 12월 황태손 생일을 축하하는 천추사(千秋使)를 따라갔던 수행원이 중국 예부 상서(尙書)의 글을 가지고 왔는데, 이번에 가지고 간 보고서에도 놀리는 글자가 있어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으니 글을 쓴 사람을 보내고 앞으로는 조공을 3년마다 한 번씩 보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즉시 통역원 곽해룡(郭海龍)을 시켜 글을 쓴 예조 전서(典書) 조서(曹庶)를 압송토록 하고, 예부 상서에게는 변명 회신을 보냈습니다. 말이 다르고 또 문서 형식 등에 서툴러 그런 것이라며, 조공도 이전처럼 설날과 황제 및 황태손 생일에 바치게 해달라는 내용입니다.
이듬해 5월 중국에서는 조서와 곽해룡의 진술서를 보내며 공모자 세 사람을 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전 예조 정랑 윤규(尹珪)와 성균관 사성(司成) 공부(孔俯), 예조 정랑 윤수(尹須)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중국에서 김약항 등을 억류하고 우리가 바친 말안장을 모두 부숴버렸으니, 올리는 글에 비슷한 발음의 글자로 장난쳐 중국에서 알아내는가를 보자고 모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조서를 데리고 가는 곽해룡에게 우리 임금이, 노인도(盧仁度), 정총(鄭摠), 오세겸(吳世謙) 등을 돌려보내지 않는 것은 그들을 길잡이로 만들어서 우리 땅을 정벌하려는 것이 아닌지 자세히 알아보고 돌아와서 알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백관과 원로들을 조정에 모아 세 사람을 중국에 보내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의논토록 했습니다. 보내는 것을 옳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는데, 다만 서원군(西原君) 한상경(韓尙敬) 등 몇몇 사람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정구(鄭矩) 등은 세 사람을 보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아뢰었습니다. 황태손 생일 축하가 지난해에 처음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글과 양식이 과거와 다른 것도 아닌데 중국의 노여움은 지난해부터 일어났으니, 그렇게 하는 데는 틀림없이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중국에서 거짓 자백을 받아내 세 사람을 불렀으나, 세 사람에 그친다면 보내도 좋겠지만 세 사람의 진술을 받고 죄명을 꾸며 만든다면 따르기 어려운 명령을 내릴 것이니 장차 어떻게 대응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이 좌정승 조준 등과 의논했으나 망설이고 결정짓지 못했는데,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변중량(卞仲良) 등이 글을 올렸습니다.
세 사람이 떠나고 머무는 것은 하찮은 일이지만 이에 따라 나라의 형세가 달라질 것이며, 중국이 쉽게 쳐들어올 수 없는 지리적 이점을 갖추고도 옳지 못한 명령에 임시변통으로 우리의 의사를 굽혀 따름으로써 먼저 겁내고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잇따라 따르기 어려운 명령이 있을까 염려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중국이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큰 문제가 어찌 일개 서생(書生)이 가느냐 마느냐에 따라 결정되겠느냐며, 변칙이지만 세 사람을 머물러 두고 글로써 원통함을 변명하고 우리의 강한 형세를 보이라고 청했습니다. 아울러 억류당한 정총, 김약항 등과 조서, 곽해룡의 집에 때때로 위문하고 부모와 처자를 잘 돌보라고 건의했습니다.
임금이 그 글을 내려 서로 의논하게 하니, 도당(都堂)에서는 모두 보내자고 했습니다. 이에 세 사람을 중국에 보내면서, 임금이 타일렀습니다.
“마음을 바르게 가지면 하늘이 반드시 그대들을 도울 것이다.”
세 사람이 두 번 절하고 나갔습니다. 예부 시랑에게 회답을 보냈는데, 글은 비록 조서가 쓴 것이지만 옛날 것에 의거해 썼을 뿐이고 윤수 등 세 사람은 글자나 쓸 줄 알지 글 뜻은 깊이 알지 못해 글 쓰는 것을 맡기지 않았는데 같은 부서에 있어 지목됐으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들 일행은 요동(遼東)까지 갔다가 황제가 죽고 새 황제가 즉위해 사면령이 내리는 바람에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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