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7년 10월 도성 공사가 마무리되자 각 도의 일꾼 2만 명을 징발해 궁성(宮城)을 쌓으라고 도당에 지시합니다. 경상 전라도는 1월 20일까지, 충청 풍해도는 1월 15일까지로 기한을 정했습니다.
1398년에 접어들면서 임금은 궁성 공사를 적극적으로 챙깁니다. 궁성 쌓는 일꾼들에게 양식을 주도록 지시하는가 하면, 궁성 감독관에게 술을 내려주기도 합니다. 수시로 궁성을 순시해 일을 제대로 못한 감독관 몇십 명에게 볼기를 치고, 문하부 참찬 박위를 도제조(都提調)로 삼아 일을 제대로 했는지 조사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폭풍이 불고 눈이 많이 내리는 가운데 공사가 진행돼, 밤에 일꾼이 불을 낸 적도 있었습니다. 북쪽 감독 막사에 옮겨붙어 탔는데, 전 개성부 윤 남성리(南成理)가 술에 취해 나오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2월 초에는 도성의 남문이 이루어져 임금이 가서 보았고, 며칠 뒤에는 성 쌓는 공사를 감독하던 각 도의 수령을 돌려보내도록 지시했습니다. 문 무 각급 관원에게 궁성 쌓을 돌을 바치도록 했으며, 대궐 군영 절제사인 순녕군 이지와 중추원 부사 이천우 등에게 지시해 갑사를 거느리고 궁성 공사를 나누어 독려하게 했습니다. 임금은 틈만 나면 궁성을 돌아보았습니다.
농사철이 되자 3월 초에는 궁성 쌓는 일꾼들을 놓아보내도록 했습니다. 병으로 죽은 사람이 모두 54명인데, 해당 지역 관청으로 하여금 각기 쌀 콩을 주고 그 집의 부역을 3년 동안 면제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김주, 김사행의 말에 따라 군자감 지을 재목을 운반한 뒤 놓아보내라고 고쳐 지시했는데,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에서 먼저 명령에 따라 일꾼들을 놓아보내자 궁성 공사 감독관 정의(鄭義), 강회중 등 13명을 가두었다가 볼기를 치고 직무에 돌려보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지방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임금은 4도의 고을들을 유후사 성(城)과 새 도성에 나누어 소속시켜 때때로 성을 보수하게 했습니다. 경기우도와 풍해도는 유후사에, 경기좌도와 충청도는 새 도읍에 소속시켰습니다.
한편 이 무렵 광주(廣州)에서 새로 주조하던 종이 완성됐습니다.
앞서 권중화와 이염을 제조관(提調官)으로 삼아 종을 주조하라고 지시하고 곧 시내에 누각을 만들었는데, 이염은 성질이 강팍해 제 마음대로 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아 세 번을 주조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1395년 9월에도 종 만드는 곳에 거둥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1396년 6월에는 큰 저자에 나가 새로 만든 종을 보았지만 네댓 번 쳐보자 종이 깨져 다시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12월에 임금이 종루(鐘樓)에 거둥해 새로 주조한 종을 보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실패한 종이어서 다시 만들고 이때 완성했던 모양입니다.
임금은 1398년 2월에 삼사 영사 권중화에게 전적으로 맡겨 종 만드는 것을 감독케 했습니다. 권중화가 여러 사람의 말을 널리 듣고 또 기발한 생각을 써서 한 번에 주조해 만드니, 임금이 기뻐 상을 내렸습니다. 권중화는 백금(白金) 50냥을 넣어 종을 주조했습니다.
임금이 광주에 거둥해 새로 주조한 종을 보았으며, 백악(白岳)과 목멱(木覓)에 제사지냈습니다. 임금은 4월 들어 다시 광주에 거둥해 새로 주조한 종을 구경하고 제조 권중화에게 안장 갖춘 말을 내려주었습니다. 경기 좌 우도 군사 1천3백명을 동원해 시내의 누각 아래까지 옮겨 놓았습니다.
종의 명문(銘文)은 예문춘추관 학사 권근이 지었습니다.
훌륭하신 우리 임금께서 천명 받으심이 넓고 컸으니, 이에 와서 한수(漢水) 북쪽에 새 도읍을 세웠다. 옛날 개성에 있었을 때에 국운(國運)이 쭈그러들었는데, 우리 임금께서 이를 대신하고 포학을 덕으로 제거하니 백성이 전쟁을 피하고 조정은 깨끗해졌으며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 힘을 다해 태평을 이룩했다. 멀고 가까운 사람들의 귀부(歸附)가 늘고 번잡해졌다. 이에 저 종을 주조해 새벽과 저녁에 소리를 울리게 한다. 우리의 공덕을 새겨 천만 년 동안 새 도읍을 진압하리라.
4월 15일 임금은 종루(鐘樓)에 거둥해 종 다는 것을 보았으며, 10여 일 뒤 종루에 거둥하고 종을 쳐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해 5월 서울 주산(主山)의 소나무가 말라죽고 여름철에 서리가 내리자 임금은 죄인들을 용서하도록 지시했는데, 귀양갔던 궁성 공사 감독관들도 여기에 포함됐습니다.
또 신하들에게 당면 정치의 잘되고 잘못된 점과 백성의 이로운 일과 고충을 진술해 보고토록 했는데, 모두 토목 공사를 빨리 중지하라는 내용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임금이 도당에 내려 궁궐조성도감을 없애고 그 사무를 선공감에 이관시키며, 서울과 지방의 기술자들을 놓아 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임금은 이튿날 양정(涼亭)에 앉아 진술한 말을 각기 들어 조목조목 대답했습니다. 어떤 것은 잘못을 스스로 책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허물을 신하들에게 돌려 힐책하기도 하며 모두 진술한 말의 끝에 써서 도당에 내렸습니다. 좌정승 조준 등이 아뢰었습니다.
"궁궐과 성문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간각(間閣)은 열흘 안에 일을 마치고 공사를 끝내게 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임금이 궁성 동문 위에 일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고 담당 관원을 불러 물었습니다.
"내가 재상의 말을 들어 공사를 그만두게 했는데, 아직도 일을 시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궁성의 일꾼을 다 놓아보내지 않은 것은 도평의사사의 통보에 따라 기와를 덮게 한 때문입니다."
"내가 이미 공사를 그만두게 했는데, 다시 청하지 않고 일을 시킨 것은 잘못이다."
곧 이문화를 시켜 도당에 명령을 전하게 했습니다.
"궁궐 공사를 시작하고 나서 지금까지 그만두지 못한 것은 다 마치지 못한 곳이 있어서일 뿐이며, 만약 마쳤다면 그대로 다시 백성을 일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가뭄이 너무 심해 지난번에 농부를 가려 모두 놓아 보내고 중들과 각종 기술자들만 남겨 두었을 뿐인데, 공사를 그만두라고 굳이 청해 나도 마지못해 따랐다. 내가 그대로 중지하지 않은 것이 옳지 않다면, 공사를 그만두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즉시 놓아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들을 놓아 보내지 않고 그대로 일시켰다. 내가 전날 그만두게 하지 않고 그대로 놔둔 것도 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니, 그렇다면 굳이 그만두라고 청한 것도 잘못이 있지 않는가? 어찌 그 잘못만은 논하지 않는가?"
이때 우정승 김사형이 휴가를 얻고 집에 있어 정승 조준이 홀로 명을 들었는데, 대답할 말이 없어 "신에게 죄가 있습니다" 하는 말만 했다고 합니다.
공사의 폐단을 극력 간했던 중추원 사(使) 이지는 임금의 뜻을 거슬리는 바람에 6월에 궁성 남문 공사 감독을 떠맡았습니다. 임금은 중국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일꾼을 적게 주어 그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고 기일을 정해 준공을 책임지웠습니다.
7월에는 경기좌도와 충청도의 일꾼 3천7백 명을 동원해 궁성을 수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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