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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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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77>

제7강 맹자(孟子)-5

다음 구절은 유명한 곡속장(觳속章)의 일절입니다. 원문을 다 싣기에는 너무 길어서 앞뒤를 자르고 가운데만 살려서 실었습니다. 앞뒤로 잘린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합니다.

제 선왕(齊宣王)이 맹자에게 춘추전국시대의 패자(覇者)인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晋文公)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선왕의 이 물음에 대하여 맹자는 매우 부정적으로 대답합니다. 무력으로 패자(覇者)가 되었던 제환공과 진문공에 대하여 공자의 제자들 중 누구도 이야기한 사람이 없으며, 맹자 자신도 들어본 일이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그리고 패도(覇道)가 아닌 왕도(王道)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왕도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며 이러한 왕도로 통일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고 설파합니다.

그러자 선왕이 자기와 같은 사람도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 물음에 대하여 맹자는 자신 있게 "가(可)"라고 대답합니다. 선왕이 그 까닭을 묻자 맹자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원문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지요.

臣聞之胡齕曰 王坐於堂上 有牽牛而過堂下者 王見之曰 牛何之 對曰 將以釁鍾 王曰 舍之 吾不忍其觳속若 無罪而就死地 對曰 然則癈釁鐘與 曰 何可癈也 以羊易之---不識有諸(梁惠王 上)

釁鍾(흔종) : 제사의 일종. 짐승의 피를 종에 바르는 제사.
舍(사) : 중지하다. 그만두다. 捨.
觳속若(곡속약) : 부들부들 떠는 모양.
何可廢(하가폐) :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 중지하기 어렵다.
以羊易之(이양역지) : 양으로 바꾸다. 양과 교환하다.
不識有諸(불식유제) :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다. 諸는 之於의 준 말.

신(臣)은 호흘(胡齕)이라는 왕의 신하가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왕께서 대전(大殿)에 앉아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대전 아래로 소를 끌고 지나갔는데 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 소 어디로 끌고 가느냐?"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흔종에 쓰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왕께서 "그 소를 놓아주어라. 부들부들 떨면서 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양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흔종 의식을 폐지할까요?" 그러자 왕께서는 "흔종을 어찌 폐할 수 있겠느냐. 소 대신 양으로 바꾸어라"고 하셨다는데 ----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상이 원문의 번역입니다. 맹자가 제 선왕이 왕도(王道)를 실천할 자질을 판단하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제 선왕의 신하인 호흘한테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보지 못하여 양으로 바꾸라고 한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제 선왕에게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맹자의 질문에 대한 선왕의 답변과 맹자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왕: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맹자: 그런 마음씨라면 충분히 천하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인색해서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신은 왕께서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왕: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백성도 있을 것입니다만 제(齊)나라가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내가 어찌 소 한 마리가 아까워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죄 없이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맹자: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하더라도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라고(以小易大) 하였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어찌 왕의 깊은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서 소와 양을 차별할 수 있습니까?(牛羊何擇焉)

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재물이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닌데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으니 백성들이 나를 인색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겠군요."

맹자: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곧 인(仁)의 실천입니다.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군자가 금수(禽獸)를 대함에 있어서 그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그 죽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그 비명소리를 듣고 나서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군자가 푸주간을 멀리하는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맹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동물에 대한 측은함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측은함으로 말하자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見), 만나고(友), 서로 안다(知)는 것입니다. 즉 '관계(關係)'를 의미합니다.

브리짓드 바르도. 프랑스의 유명한 여배우입니다만 한국의 보신탕에 대하여 공격적인 비난을 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발상에는 2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동물애호가임에는 틀림없지만 문제는 애완견을 알제리의 어린이들보다 더 아낀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극우파가 그러하듯이 아마 애완견을 알제리 어린이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한국에서도 자기 집에서 기르는 개는 먹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아시아인은 애완견도 먹을 수 있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극우파다운 인종 우월주의입니다.

엉뚱한 곳으로 이야기가 빗나갔습니다만 우리가 이 대목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동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실상(實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만남이 없는 사회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不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입니다.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의 전제가 되는 만남(見)이 없는 사회라는 것이지요.

두부에 석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두부 생산자가 두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요.

두부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전에 이야기하였듯이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이것은 어느 특정 상품의 생산-소비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모든 물류(物流)와 인적 교류(交流)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회의 기본적 구조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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