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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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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73>

제7강 맹자(孟子)-1

맹자(孟子)의 생몰 연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공자 사후 약 1백년경인 BC 327년경에 태어나서 향년 74세에서 84세 94세 97세 등 사전(史傳)에 기록이 없어서 번거롭기가 대단합니다.

대체로 공자 사후 약 1백년 뒤에 산동성(山東省) 남부 추(芻)에서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가(軻)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자가 춘추시대 사람이라면 맹자는 전국시대 사람입니다. 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한 사람입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는 많은 학자와 학파의 총칭으로서 전국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자(子)는 학자(學者)를 의미하고 가(家)는 학파(學派)를 의미합니다.

춘추시대(春秋時代)의 군주(君主)는 그 지배영역도 협소하고 그가 시행하는 정치도 전통에 속박되고 특히 군주의 권력이 귀족세력들의 제어를 받는 제한군주(制限君主)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군주는 강력한 주권을 행사하는 절대군주(絶對君主)였습니다. 춘추시대에 비하여 국가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수많은 나라가 결국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압축되고 드디어 진(秦)나라에 의하여 천하가 통일되는 과정을 밟습니다.

따라서 전국시대는 사활적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모와 하극상이 다반사였으며 배신과 야합이 그치지 않은 난세의 전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주는 사방에서 정치이론에 통달한 학자를 초빙하여 국가경영에 관한 고견을 듣는 것이 상례화 되어 있어서 조정은 마치 일종의 사교장이었습니다. 제자백가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한 학자들의 총칭입니다.

맹자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물론 다른 모든 사상가의 이해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만 특히 이러한 시대적 상황의 차이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가 물론 공자를 잇고 있는 사상가임에 틀림없습니다만 우리의 강의에서는 공자시대의 유가학파의 중심사상이 맹자 시대에는 어떠한 사상으로 그 중심이 이동하였는가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일치하고 있는 견해는 공자의 인(仁)이 맹자에 와서는 의(義)의 개념으로 발전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인(仁)의 사회화(社會化)라는 것이지요.

맹자의 제1장은 별로 낯설지 않은 글입니다. 이 첫 장에서 맹자가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이 의(義)입니다.

孟子見梁惠王 王曰 “叟! 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對曰 “王! 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 뵈었을 때 왕이 말하였다.
“선생께서 천리 길을 멀다않고 찾아주셨으니 장차 이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가져 오셨겠지요?”
맹자가 대답하였다.
“임금님!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 맹자는 인(仁)과 의(義)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만 맹자는 의(義)에 무게를 두고 있는 사상입니다. 인과 의의 차이가 곧 공자와 맹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한마디로 인(仁)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義)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仁)에 비하여 사회성(社會性)이 많이 담긴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 예제를 통하여 이 부분을 재론하도록 하지요.

위 예제에서는 너무 길어서 원문을 생략하였습니다만 이 첫 장은 맹자는 계속해서 자기의 주장을 설파합니다.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시면, 대부(大夫)들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야 내 영지(領地)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고, 사인(士人)이나 서민(庶民)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위아래가 서로 다투어 이(利)를 추구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맹자의 글은 매우 논리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논어(論語)’가 선어(禪語)와 같은 함축적인 글임에 비하여 ‘맹자’는 주장과 논리가 정연한 논설문입니다.

예부터 ‘맹자’로서 문리(文理)를 틔운다고 합니다. 그만큼 한문(漢文)의 문학적(文學的) 모범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첫 장의 내용을 끝까지 읽어보도록 하지요.

“만승(萬乘)의 천자를 시해하는 자는 필시 천승(千乘)의 제후일 것이고, 천승의 제후를 시해하는 자는 필시 백승(百乘)의 대부(大夫) 중에서 나올 것입니다. 일만(一萬)의 십분의 일인 일천(一千)을 가졌거나, 일천(一千)의 십분의 일인 일백(一百)을 가졌다면 결코 적게 가졌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의(義)를 경시하고 이(利)를 중시한다면, 남의 것을 모두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진(仁) 자로서 자기의 부모를 저버린 자가 없고, 의(義)로운 자로서 그 임금을 무시한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과 의를 말씀하실 일이지 어찌 리(利)를 말씀하십니까?”

맹자와 이 대화를 나눈 임금은 위(魏)나라의 혜왕(惠王)입니다. 당시 수도를 안읍(安邑)에서 대량(大梁)으로 옮겼었기 때문에 흔히 양왕(梁王) 또는 양혜왕이라고 하였다고 전합니다.

주자주(朱子註)에서는 양혜왕은 위나라 제후 앵(罃)으로서 대량(大梁)에 도읍하여 왕을 참칭(僭稱)하여 예를 갖추고 패백을 후히 하여 여러 어진 사람을 초청하여 맹자도 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연고로 양혜왕과 대면하여 대화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맹자의 태도는 단연 의연하기 그지없습니다.

내가 잘 아는 동문의 한 사람으로서 최고 수준의 ‘맹자’ 역주서(譯註書)를 출간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의 맹자론(孟子論)을 잠시 소개하지요.

맹자는 학자와 사상가로서뿐만 아니라 문장가와 문학가로서도 최고의 경지라는 것이지요. 어떠한 고전도 ‘맹자’만큼 힘차고, 유려하고, 논리 정연하고, 심오한 뜻을 지니고, 현재에도 그 내용이 여전히 타당하며, 사람의 정신을 분발시키는 문장들로 가득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나로서도 충분히 수긍이 가는 주장입니다. 사실 ‘맹자’는 그의 주장과 같이 “문구(文句)의 생략과 중복이 절묘하고, 흐름이 경쾌하고 민첩하며, 비유가 풍부하고, ---- 어떠한 상대도 설복시킬 정도로 논리가 정연하다.”고 예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의문(疑問), 감탄(感歎), 부정구(否定句) 등 문장의 형식도 다양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하여 한문(漢文)의 문법(文法)과 예문(例文)의 교범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맹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많은 숙어들의 출전으로서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이 ‘맹자’입니다. 연목구어(緣木求魚),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 농단(壟斷), 호연지기(浩然之氣), 인자무적(仁者無敵), 항산항심(恒産恒心) 등 이루 다 지적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맹자는 조금 전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공자 사후 1백년경에 활동한 사상가로서 맹자 당시에는 유가(儒家)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쇠미하여 오히려 묵자(墨子)와 양자(楊子)사상이 크게 떨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맹자는 당시 세상에 크게 떨치고 있던 다른 사상과의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나갑니다. 따라서 맹자에는 농가(農家), 병가(兵家), 종횡가(縱橫家) 등 당시의 다른 많은 사상이 소개되고, 또 비판되고 있기 때문에 제자백가의 사상을 가장 폭넓게 접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단 한 권의 고전을 택하려고 하는 경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단연 ‘맹자’가 천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 제1장의 내용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야기하지요.
결국 양혜왕은 기대하는 해답을 결국 맹자로부터 얻지 못하고 만 셈이지요.

맹자의 사상과 정책은 결국 당시 패권(覇權)을 추구하던 군주들에게 채용되지 못하였습니다. 맹자 사상이 공자의 인(仁)을 사회화하였다고 하지만 당장의 부국강병을 국가적 목표로 하고 있던 군주들에게 사회적 정의는 너무나 우원(迂遠)한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활적 경쟁에 내몰리고 있었던 군주들에게 정의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혜왕이 말했던 이(利)란 오로지 부국강병의 류(類)였던 것이지요.(王所謂利 蓋富國强兵之類)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제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정책제안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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