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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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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51>

태조 절에 70일간 머물기도

왕사 자초를 통한 태조의 불교 신봉은 여전했습니다.
1393년 3월 연복사(演福寺) 5층 탑이 완성되자 임금은 내시부 별감(別監)을 회암사에 보내 자초를 불러오도록 했습니다. 연복사에서 문수(文殊) 법회를 베풀게 하고는 임금이 직접 거둥해 자초의 선(禪) 설법을 들었습니다.

실록은 자초가 머물던 심원사(深源寺)에는 불이 나고 회암사에는 전염병이 발생했다는 기사를 곁들였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자초를 대궐 안에서 접대하고 비단을 내려주는 등, 유학 세력의 이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인 의비의 제삿날에는 직접 회암사에 가 중들을 공양하기도 했습니다.

7월에는 내시부 별감을 보내 왕사 자초를 도성으로 오도록 청했습니다. 왕사가 되었으니 산 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자초는 회암사에 있었는데, 봄에 회암사에서 전염병이 발생해 자초가 연복사의 문수 법회에 왔다가 법회가 끝난 뒤 회암사로 돌아가지 않고 곡주(谷州, 곡산)의 불국장(佛國莊)으로 가 거처하고 있었습니다. 회암사의 전염병은 여름 들면서 크게 퍼져 중들이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자초가 오자 광명사(廣明寺)에 거처하게 했는데, 찾아가 설법을 해달라고 청하는 성 안 남녀가 하루에 1백여 명을 헤아렸습니다. 임금은 광명사에 거둥해 왕사 자초를 만나기도 하고, 그를 청해 재(齋)를 베풀게 하고 명주 비단을 시주하기도 했습니다.

조상의 제삿날에는 중들로 하여금 대궐 안에서 경을 외게 하고 광명사에서 중 5백 명씩을 공양하기도 했습니다. 이해 자신의 생일날에는 광명사에서 중 1천5백 명을 공양했습니다.

임금이 불교를 믿으니 이해 10월에는 임금이 아예 경천사(敬天寺)라는 절로 옮겨가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임금이 편찮아 9월 말부터 도당에 피접할 곳을 알아보도록 지시하고 도당에서는 불일사(佛日寺)에 모여앉아 의논했으며, 서운관 관원을 대궐 안으로 불러 길지(吉地)를 점치게 하는 등 법석을 떤 끝에 그리로 간 것입니다.

도평의사사 이하 각 부서도 따라갔다가 도성으로 돌아갔으며, 대간과 형조에서 1 명씩만 남고 의흥삼군부는 번을 갈아 숙직 호위하게 했습니다.

임금이 나가 있게 되자 도당의 모든 부서는 정례 조회 때면 절로 갔습니다. 임금은 번거롭다며 정례 조회를 중지시켰습니다. 각 부서마다 1 명씩 수창궁에 번갈아 숙직하게 하고, 사헌부로 하여금 그들의 근무 상태를 살피게 했습니다.

임금은 두어 차례 수창궁에 왔다갔다하기는 했지만, 연말까지 70 일 동안 그 절에 머물렀습니다.

1394년 2월에는 임금이 사흘 간격으로 세 차례나 연복사에 거둥해 문수법회를 구경했습니다. 왕사 자초가 죄수 사면을 건의하자 그대로 따랐으며, 자초를 내전으로 불러 공양했습니다. 4월에는 왕비와 함께 경천사에 가 아버지 환조의 초상화를 봉안한 뒤 재를 베풀었습니다.

9월에는 천태종(天台宗)의 중 조구(祖丘)를 국사(國師)로 삼았습니다. 내전에서 중 1백8명을 공양하며 국사 봉숭례를 베풀고 안장 갖춘 말을 내려주었습니다. 그는 국사가 된 지 1년여 만인 이듬해 11월에 병으로 죽었습니다.

임금은 누가 앓거나 하면 으레 중들을 불러다 빌게 했습니다. 1395년 1월 은천군 조기가 등창이 나서 죽게 되자 중들을 대궐 뜰에 모아 빌게 하는 한편 궁궐에 부역 나온 중 50명을 돌려보냈습니다. 7월에는 현비가 앓자 중들을 공양하고 부처에게 빌도록 했습니다.

이해 4월에는 왕사 자초가 능엄 법회를 베풀자 회암사에 쌀 콩 1백70 섬과 오승포 2백 필을 내려주었습니다. 7월에는 내시를 회암사에 보내 자초의 안부를 묻고 모시 삼베를 내려주었습니다. 이때 자초가 아프다는 말을 들었는지, 며칠 뒤 전의시 감 양홍원을 보내 치료하게 했으며, 병이 낫자 양홍원에게 대궐 말 1 필을 내려주었습니다.

1397년 4월에 간관은 서정쇄신책 10 개조를 건의하는 가운데 다시 불교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놀고 먹는 중들을 엄금해 도첩(度牒)을 받지 않는 자는 출가(出家)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어기는 자는 부모 등까지 처벌하라는 것이었는데, 임금도 허락했습니다.

또 나랏일을 보는 근정전(勤政殿)에서 중에게 경(經)을 외우게 하는 것은 이름 지은 뜻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했습니다. 7월에는 중들이 노비 문제 등으로 자주 소송을 일으킨다며 절의 재산과 중의 수 등에 대한 일제조사를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여전히 불사에 열심이었습니다. 인왕사(仁王寺)에 거둥해 조생(祖生)이라는 중을 직접 찾기도 하고, 경기 백성을 징발해 왕사 자초의 부도(浮屠)를 회암사(檜岩寺) 북쪽에 미리 만들게 했습니다.

한편 회암사(檜岩寺)에 쌀 1백 섬을 내려주고 강릉도(江陵道) 쌀 6백 섬을 오대산(五臺山) 금강산(金剛山)의 여러 절에 시주하게 했습니다.

이성계가 쫓겨난 해인 1398년에 들어서자 불사가 더욱 빈번해졌습니다. 연초부터 진관사에 수륙재를 베풀고 근정전(勤政殿)에 중 1백8 명을 모아 화엄삼매참(華嚴三昧懺) 법회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여러 창고에 뒷바라지를 지시했는데, 내시 김사행(金師幸)의 농간으로 사치가 너무 심했다고 합니다.

오대산에서 온 인왕사(仁王寺) 내원당(內願堂) 당주(堂主) 조생(祖生)을 보러 인왕사에 직접 가기도 했고, 금강산에서 온 도승통(都僧統) 설오(雪悟)를 보기 위해 지천사(支天寺)에 직접 가기도 하는 등 절 출입이 잦았습니다. 또 연복사(演福寺)와 안국사(安國寺), 중흥사(重興寺)와 억정사(億正寺), 복령사(福靈寺)와 해인사(海印寺) 등 절에 대한 조세를 받지 말도록 잇달아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이해 5월에는 군사 2천 명을 동원해 대장경 목판을 강화(江華) 선원사(禪源寺)로부터 지천사(支天寺)로 옮겨왔습니다. 검교 문하부 참찬(參贊) 유광우(兪光祐)가 향로(香爐)를 잡고 따르고, 5교(五敎) 양종(兩宗)의 중들이 불경을 외우며 의장대(儀仗隊)가 북 치고 피리 불며 앞에서 인도하는 거창한 행렬이었습니다. 임금은 용산강(龍山江)에 나가 직접 구경했습니다.

7월말 흥천사에 가 부도탑을 본 것이 태조가 쫓겨나기 전의 마지막 불사였습니다. 그는 그곳에 갔다 온 뒤 바로 앓아 누워 8월말 아들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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