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올린 글 문제로 홍역을 치룬 정도전 쪽에서는 1397년에 무고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해 4월 사헌부에서 전 호조 판서 양천식을 탄핵하고 또 삼사 판사 설장수와 화산군(花山君) 권근을 탄핵했는데, 그 경위는 이렇습니다.
앞서 중국에서 황제에게 올린 글에 불손한 글자가 들어 있다며 그 글을 지은 정도전을 불렀는데, 정도전이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습니다. 권근이 임금에게 말해 중국에 가서 변명하겠다고 청했습니다.
임금은 권근을 부르는 명령이 없다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권근이 다시 청하자 임금이 말했습니다.
"경은 나이 많은 부모가 있고 또 황제의 명령이 없으니 차마 보낼 수 없다."
권근이 말했습니다.
"부르는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신을 보내면 병으로 못 가는 사람도 의심을 면할 수 있고 신도 혹 용서받을 수 있지만, 부름을 받아 가면 신의 죄가 더욱 무거워질 것입니다."
그러자 임금이 허락했습니다. 당시 여론은 권근이 가는 것을 훌륭하게 여기고 정도전을 비난했습니다. 정도전이 전해 듣고 그를 마음속으로 꺼려 임금에게 말했습니다.
"권근은 이색이 사랑하던 제자입니다. 이색이 일찍이 1389년에 주상을 황제에게 고자질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지금 권근이 굳이 청해 가니 틀림없이 딴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권근을 보내지 마소서."
임금이 듣지 않았습니다. 권근이 떠난 뒤에 사람을 중로에 보내 황금을 노자로 주었습니다.
권근이 황제의 후대를 받고 돌아오자, 정도전은 사헌부를 사주해 정총 등이 모두 억류당해 있는데 혼자 풀려나 돌아왔다는 이유로 권근을 탄핵하게 한 뒤 임금에게 말했습니다.
"정총 등은 모두 돌아오지 못했는데 권근만 금을 상으로 주어 보냈으니, 과연 신의 추측대로입니다. 청컨대 권근을 국문하소서."
"어떻게 금을 상으로 준 것을 아는가?"
"듣자니 권근이 금을 가지고 다니며 쓴다는데, 황제가 준 것이 아니라면 저 가난한 선비가 어디서 금을 얻었겠습니까?"
임금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가난한 선비라 해도 어찌 금을 얻을 방법이 없겠는가?"
정도전은 그 금을 임금이 주었다는 사실을 모른 것이었습니다. 정도전이 힘껏 국문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말했습니다.
"천자가 진노했을 때 자청해 가서 황제의 노여움을 풀리게 해 다시 경을 부르지 않았으니, 나라에도 공이 있고 경에게도 은혜가 있다. 나는 상을 주려 하는데 도리어 처벌을 청하는가?"
그러고는 권근에게 업무에 나오도록 지시했습니다. 정도전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했습니다.
권근을 처벌하지 못한 정도전은, 역시 미워하던 양천식 설장수도 중국에 들어가서 무슨 말을 했다고 무고한 것이었습니다.
몇 달 뒤 사헌부는 양천식이 명나라 사신에게 몰래 정도전을 데리고 돌아가라고 권했으며, 또 조순에게 비단과 노비를 뇌물로 주어 그 죄를 면하려 했다고 다시 탄핵했습니다.
결국 재산을 몰수하고 섬으로 귀양보내 종신토록 관리 신분을 박탈하라는 허락을 얻어냈습니다. 양천식은 죽기로 버티고 인정치 않아 진술서도 만들지 못했지만 임금이 결국 그들의 강청을 물리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일찍이 의흥삼군부 판사로서 '오진도(五陣圖)'와 '수수도(蒐狩圖)'를 만들어 바치니 임금이 좋아하며 훈도관(訓導官)을 두어 가르치도록 지시했습니다. 각 절제사 군관과 서반 각급 관원, 성중관(成衆官)으로 하여금 진도(陣圖)를 강습하게 하고 또 잘 아는 사람을 각 도에 나누어 보내 가르치게 했습니다.
6월에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 밖으로 나가려고 임금에게 건의하고 좌정승 조준의 집에 가 알렸습니다. 조준은 그때 병을 앓고 있었으나 즉시 가마를 타고 대궐에 나가 극력 불가함을 아뢰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큰 나라를 섬기는 예를 잃지 않았고, 또 새로 개국한 나라가 가벼이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 득실을 따지더라도 천자의 조정이 당당해 찔러볼 허점이 없으니, 신은 거사해야 성공하지 못하고 뜻밖의 변만 생길까 염려됩니다."
임금이 듣고 기뻐했으나, 남은은 분개해 말했습니다.
"두 정승은 몇 말 몇 되를 출납하는 일이나 하면 족하다. 더불어 큰 일을 도모할 수 없구나!"
이로 말미암아 남은 등은 조준과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나중에 남은이 임금에게 조준을 헐뜯으니, 임금이 화가 나 남은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결국 봉화백 정도전과 의성군 남은에게 안장 갖춘 말을 내려주며 달랬습니다.
8월 들어 진도(陣圖) 훈도관을 각 도와 진(鎭)에 나누어 보내고 삼군부로 하여금 매일 절제사에서 산원까지 모아 저자거리에서 진법을 익히게 했습니다.
이해 12월 정도전은 동북면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로 나갔습니다. 문하부 참찬 이지란이 도병마사로 따라갔습니다. 정도전은 경원부에 성을 쌓고 동북면 지역의 행정 체제를 정비합니다.
이듬해 2월 임금은 중추원 부사 신극공을 동북면 도선위사(都宣慰使)로 삼아 편지를 가지고 가서 도선무순찰사 정도전에게 옷과 술을 내려주도록 했습니다. 그 편지는 이러합니다.
"서로 헤어진 지가 오래 되어 생각이 더욱 깊으니, 신(辛) 중추를 보내 국경 지키는 노고를 묻고자 하오. 최긍이 마침 와서 동정을 이것저것 알려주니 스스로 조금 위로되고 풀리오. 이에 속옷 한 벌을 보내 바람과 이슬을 막게 하니 받아주면 다행이겠소. 이(李) 참찬과 이(李) 절제사에게도 함께 속옷 한 벌씩을 부치니 사랑하는 뜻을 전해주면 다행이겠소. 나머지는 신 중추가 말할 것이오. 꽃샘추위에 철을 거스르지 말고 스스로 보전해 변방의 공(功)을 이루도록 하시오. 갖추지 못한 채, 송헌거사(松軒居士) 씀."
신 중추는 선위사로 간 신극공, 이 참찬은 도병마사로 가 있던 이지란, 이 절제사는 이원경입니다. 이 편지를 보내면서 임금은 자신을 어떻게 칭할지를 고민하다가 좌승지 이문화에게 물었습니다.
"전 왕조의 충숙왕(忠肅王)이 거사(居士)라고 일컬어 예천군(醴川君) 권한공(權漢功)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들었는데, 나도 봉화백에게 거사라고 일컬어 편지를 보내려고 한다. 호(號)를 뭐라고 할까?"
이문화가 대답했습니다.
"상감의 잠룡(潛龍) 때 헌호(軒號)가 어떻습니까?"
임금이 좋다며 송헌으로 호를 삼았습니다.
편지를 받은 정도전은 글을 올려 왕명 수행 상황을 보고하고 은혜에 사례했습니다.
3월에는 임금이 평주 온천에 갔는데, 정도전이 도병마사 이지란과 함께 복명하니 각각 안장 갖춘 말을 주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임금이 정도전에게 말했습니다.
"경의 공이 윤관보다 낫다. 윤관은 다만 아홉 성을 쌓고 비(碑)를 세웠을 뿐인데, 경은 고을과 참로(站路)를 구획하고 관리의 직분까지 제도를 정하지 않은 것이 없어 삭방도(朔方道, 함경도)를 딴 도와 다를 바가 없게 만들었으니 공이 작지 않다."
이해 4월에 임금이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에게 '신도팔경(新都八景)' 병풍 한 면(面)씩을 주었는데, 봉화백 정도전이 팔경시(八景詩)를 지어 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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