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는 5월부터 서해안으로 올라와 서북면까지 노략질했습니다. 왜적이 선주성(宣州城, 선천)을 포위하니, 이성도(泥城道) 부만호(副萬戶) 김원계(金元桂)가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했습니다. 적이 패해 달아나자 김원계가 승세를 타고 적의 가운데에 뛰어들었다가 적에게 해를 당했습니다.
임금이 이를 듣고 매우 슬퍼하며 도당에 지시해 그 휘하 군사를 국문해 구원하지 않은 자를 처벌토록 하고 또 도당에 지시했습니다.
“풍해 평양 안주 3 도(道)의 수군 만호가 왜적을 잡지 못하고 싸움에 패해 달아났으니 법에 따라 마땅히 베어야 한다. 3 도 만호의 우두머리 되는 자를 법에 따라 처단해 군법을 엄하게 하라.”
간관은 김원계의 표창을 건의했습니다.
“이성 만호 김원계는 적이 선주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얼마 안 되는 군사를 끌고 길을 배나 빨리 달려 그 포위를 풀었으며, 승세를 타고 패해 달아나는 적을 쫓아 적중(賊中)에 들어갔다가 적에게 해를 당했습니다. 김원계는 본디 효용(驍勇)한 재주가 있어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거의 함락될 뻔한 성을 온전히 지켜냈고 한 몸이 죽어 만민을 살려냈으니, 그 공은 죽어도 썩지 않습니다. 원컨대 담당 부서로 하여금 관직을 추증하고, 또 선주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받들며, 자손을 등용해 충혼을 위로하고 후대를 권장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습니다.
반면 왜적이 용강현(龍岡縣)에 쳐들어왔을 때 병마 도절제사 이거이는 군사를 거느려 쫓았는데, 썰물이 되면서 적의 배 한 척이 연안에 걸려 있었지만 바로 나가 잡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듣고 사람을 보내 이거이가 미적거리며 싸우지 않은 죄를 국문하고 그 휘하 군관에게는 곤장을 치도록 했습니다.
또 전라도 수군 만호 최원충(崔原忠)이 왜적의 배 한 척을 잡았다고 관찰사가 보고하고 빼앗은 군기와 갑옷을 바쳤는데, 임금은 배를 송두리째 잡았다면서 사로잡은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그 까닭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임금은 전농시 판사 김정경(金鼎卿)을 전라도에 보내면서 지시했습니다.
“수군 만호 최원충이 일본 사신을 죽이고 그 예물과 노자를 빼앗아 군사들과 나누어 갖고 엉뚱하게도 적을 잡았다고 보고했으니, 죽고도 남는 죄가 있다. 김첨과 함께 가서 관찰사와 더불어 다시 국문하고 법에 따라 처결해 각 도에 돌려보이고 재산을 몰수하라. 모의에 참여한 자도 모두 따라서 처벌하라.”
김정경이 전라도에 이르러 순천부(順天府) 사(使) 정지(鄭漬)로 하여금 최원충을 잡아오게 했는데, 최원충은 도망쳤고 공모자인 유천은(柳天隱) 등 여섯 사람을 목베었습니다. 순천부 사 정지도 나중에 목베었습니다.
7월이 되면서 나라에서는 왜구 방어를 위한 총력 체제에 나섰습니다. 문하부 참찬으로 은퇴한 나세를 경기 풍해도 서북면 등지의 도추포사(都追捕使)로 삼고, 중추원 지사 최유경을 경기 충청도 도체찰사, 예빈시 판사 강중림(姜仲琳)을 충청도 경차관으로 삼아 병선을 거느리고 풍해 서북면 연해 등지에서 왜적을 잡게 했습니다. 사람을 보내 장수들에게 술을 내려주게 했으며, 임금이 서강에 거둥해 위로했습니다.
또 중추원 상의 진을서를 해도(海道) 조전도절제사(助戰都節制使)로, 중추원 부사 신극공 신유현 장사정을 조전절제사로 삼아 풍해도 서북면 연해 등지의 왜적을 잡게 했습니다. 술을 내려주어 위로하고 타일러 보냈는데, 군사 가운데 갑사 이순백(李順伯) 노현수(魯玄守) 등이 제멋대로 배를 타고 용산강에서 절제사 진을서 등에게 대들었습니다. 진을서 등이 화가 나 대궐 문 밖의 일은 장군이 통제한다며 군법(軍法)으로 다스리려 하니, 좌우에서 말했습니다.
“친군(親軍)이니 보고해 청해야 합니다.”
임금이 듣고 순군부에 지시해 이순백 등 두 사람에게 곤장을 때리고 배를 태우게 했습니다.
또 문하부 상의 우인열을 수군 도감전체찰사(都監戰體察使)로 삼고 임금이 용산강에 거둥해 유숙하면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해 보낸 뒤 이튿날 대궐로 돌아왔습니다. 순녕군(順寧君) 이지(李枝), 중추원 상의 이천우, 첨절제사 전영부(全英富) 장철(張哲) 등을 바다에 보내 갑사 척석군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왜구를 쫓아 잡게 했습니다. 중추원 판사 이근에게 지시해 술을 가지고 가서 위로해 보내게 했습니다.
우인열 진을서 등은 왜적을 쫓았으나 소득 없이 한 달 만에 돌아왔습니다.
임금은 용산강에 거둥해 사수감에서 새로 만든 병선을 보았으며, 전 판사 정점(鄭漸)으로 하여금 척석군과 불러 모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를 타 왜적을 잡게 하고 용산강에 거둥해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각 도의 절에 보내 병화(兵禍)를 진정하는 법회를 베풀기도 했습니다.
일흔여덟의 나이에 전장에 나갔던 노장 나세는 군중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임금은 겨울로 접어들면서 찬바람으로 얼어죽는 자가 있을까봐 풍해도 서북면 등지의 왜적을 잡는 군인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1397년>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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