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공자는 노예제 부활을 주장하는 복고주의자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공자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주로 비림비공(批林批孔)의 일환으로 임표(林彪)비판과 함께 행해졌지요. 공자가 과연 노예제 부활을 주장하였는가에 대한 논의는 당연히 주(周)사회의 성격 그리고 ‘아시아적 생산양식’(生産樣式)에 관한 논의와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앞서는 제양식(諸樣式)의 하나로서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토지사유의 부재(不在), 촌락공동체(Dorfgemeinschaft) 그리고 동양적 전제군주제를 특징으로 하는 정체적(停滯的)인 사회로 규정합니다.
주(周)사회가 이러한 단계의 사회성격을 갖는 것으로 규정되는 경우 공자는 노예제의 부활을 주장하는 복고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의 근거가 되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정체적인 사회라는 개념은 제국주의 사관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유럽의 역사발전 단계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동양적 전제군주국가(專制君主國家)라는 개념 역시 냉전시대의 조어(造語)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전제군주국가란 국가가 군주(君主)의 인격 속에서 구현된다는 논리입니다. 동양의 군주 즉 천자(天子)는 그러한 전형이 아니며 따라서 엄밀한 학문적 개념이 아니라는 반론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논의는 또 다른 전문적 논의가 됩니다. 여러분이 일단 비판적 관점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러한 공자 비판은 공자의 이론이 3백년 후 노예제 사회라는 규정이 전혀 적합하지 않은 한초(漢初)에 공식적인 국가이념이 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한대(漢代)는 관료적 중앙집권제이며 황실과 대관료지주간의 모순이 지배적인 모순이었습니다. 공자 당시에도 주례(周禮)의 회복을 주장한 공자의 보수적 왕도주의가 신흥 관료지주의 패권주의(覇權主義)에 수용되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자가 복고주의자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공자의 정치적 주장은 오히려 왕, 대부 등 귀족을 한편으로 하고 그리고 다른 한 편인 신흥 관료지주간에 벌어진 혼란과 쟁패의 와중에서 제3계급(君子)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확립하는 것이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절대왕권에 대하여 제3계급의 견제를 정당화하는 이론이 유가사상의 핵심이며 바로 이러한 제3의 길과 제3의 방식이 공자학파가 만세(萬世)의 목탁(木鐸)으로 자처하게 하는 사상적 입지(立地)라는 것이지요.
공자학파의 입지는 결국 국(國)이라는 제도적 질서와 야(野)라는 소위 재야(在野)의 질서가 대치하는 대립국면의 중간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가의 초기 발상지가 국(國)과 국(國)사이의 야(野)에 있었으며 국법질서가 미치지 못하는 이 영역은 국(國)의 질서에 저항하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의 집합처이기도 하였다는 것이지요.
이 근거지에서 소유(小儒)를 극복하고 인문질서(人文秩序)를 세우고 대유(大儒)의 길, 즉 군자(君子)의 도(道)를 지향하였던 것이 공자와 공자학파라는 것이지요. 보수와 진보, 억압과 자유라는 2개의 대립축 사이에 공자학파의 사상적 본령이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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