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동아시아 문화의 전통과 현실적인 의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동아시아 문화의 전통과 현실적인 의의

홍쯔청(洪子誠)/중국 베이징대 교수

이렇게 동아시아 문화 토론회에 참석하게 되어서 매우 영광입니다. 동아시아 한중일 지식인과 학자의 교류를 위하여 특별히 한국의 여러분들께서 많은 준비를 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그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동아시아 삼국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정치, 경제, 문화상으로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유사한 환경 속에서 지내 왔으므로, 많은 문제를 함께 풀어갈 수 있는 공통분모가 존재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과거의 지식인과 학자의 교류는 매우 불충분하였습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교류는 일반적인 인적 자원의 왕래나 혹은 이미 적지 않게 있어왔던 학술회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련된 문제를 연관지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공간 (이번에 명명된 '문화연대'와 같은) 으로서의 의미를 지닙니다. 동아시아 문화연대의 건립은 이를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나가고, 동아시아 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지식인들 간의 소통을 증강시키는데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토론회를 통하여, 우리들은 세계와 대면할 때에 '아시아 의식'을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민족국가의 틀을 깨고 새로운 참조체계를 구상하는데 유익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공통점을 본다고 하더라도, 더욱 중요한 부분은 상호간의 차이와 모순을 발견하는 데 있다고 여겨집니다. 자신의 언어안에서 문제를 사고하는 것뿐 아니라 타인의 언어속으로 들어가 자기사고의 한계를 반사(反思)해보는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토론회는 민간교류의 성격을 지니므로, 국가의식 형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우리들이 문제를 사고하는데 있어 개인경험이 개입되면서 개인사상의 면모가 반영되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중국현당대 문학연구에 종사하는 연구자이므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견해는 나의 전공과 주요하게 관련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전에는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현재에는 이미 많은 부분 잊혀져가는 혁명 (혹은 좌익) 문화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와 관련된 문제이다. 이 문제는 중국의 문화현실에 있는 절박한 의의를 지니며 동아시아 기타 국가가 당면한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혁명적 좌익문학이 30년대 중국문학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50-70년대 (당시는 새로운 인민문예, 사회주의문학, 무산계급문예 등으로 지칭되었다) 에 이르면 주류로서 절대적인 지배위치를 차지하게 되며, 심지어는 유일하게 합법적인 문학형태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혁 이후 상황은 크게 변화하여, 문화계에서 좌익문학에 대한 비판적 조류가 총체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조류의 출현은 당시 전개된 문혁비판 운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이렇게 중국현대문학과 관련된 역사서술에 있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살필 수 있다. : 50-70년대 시기는 중국현대문학사가 거의 좌익문학사로 씌어졌다. 통속소설, 자유주의같은 기타 문학형태는 삭제되지는 않았지만, 역사의 밖으로 배제되었으며, 매우 낮게 평가되었다. 문혁 이후 80년대에 사정은 거꾸로 뒤바뀌었다. 새로운 평가척도가 제출되었으며, 이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척도는 본질적인 의미로서 문학성이 강조되었으며, 또한 문학참조계로서 세계문학의 구호가 제출되었다. 이로써 필연적으로 중사문학사(重寫文學史)의 활동이 전개되었으며 점차 새로운 문학질서가 나타나게 되었다. 새로운 문학사 서술 중 좌익문학, 특히 당대 좌익문학의 지위와 가치는 크게 의심되고 제한되었다. 최근 몇 년동안 중국대륙은 20세기 중국문학사 제목을 단 저작들이 다수 출현하였으며 (공범금 주편의 『20세기 중국문학사』, 황수기 주편의 같은 이름의 저작 등) , 중국좌익문학 특히 50-70년대 문학은 큰 편폭으로 압축처리되었다. 다른 하나의 처리방식은 이 시기 비좌익문학을 돌출시켜서, 그것을 이 시기 최고의 가치있는 부분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서는 曠新年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이러한 학술질서를 통하여 좌익문학은 점차로 문학의 밖으로 배제되었다. 장광자, 胡也頻, 殷夫에 대해서도, 좌익문학에 대해서도 억압기제로 변화하였다.([동요하는 문학사], 북경, [문학평론] 1999년 제1기)

이것은 문혁 이후 중국에서 발생한 현상이다. 이것은 혁명이 실패를 선고한 것을 의미하며, 사람들이 고별혁명의 연대속으로 편입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사정이다. 이로써 혁명과 그 문화현상은 이미 먼 기억이 되었다. 90년대 초 내가 일본에서 연구할 때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였다. 그 대학의 연구실에는 중국문화를 연구하는 교수들이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한 부류는 4,50년대 냉전이 진행되던 시기, 일본의 활로를 고민하고 중국혁명을 동경하면서 당시 중국문화 연구를 선택하였다. 다른 한 부류는 60년대 급진적인 학생운동의 참가자들로서, 어떤 경우는 동경대학 안전강당(安田講堂) 점령에 참가하였던 투사이면서, 문혁중에는 홍위병 경험을 체험하기 위하여 중국을 방문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력에 대하여 우리들은 모두 함구하였다. 대개는 잠깐 언급하다 말아버리고, 우연히 얘기하다가도 금새 격세지감을 느끼며, 거의는 그저 식후의 농담거리로 삼아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안전강당의 불에 탄 흔적은 이미 하나의 풍경으로 남았다. 초기 학생운동 열기속에서 극장활동이 전개되었던 하북못에는 이미 물질적인 향락에 탐닉하는 신인류의 출몰로 밤시간이 채워진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중국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중국좌익문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하여 문학계에서 새로운 문제제기가 일고있다. 작년 대륙에서는 계속해서 좌익문학과 관련된 토론회 (북경, 중국현대문학관), 17년문학과 문혁문학 관련 토론회(蘇州大學)를 개최하였다. 몇몇 간행물은 또한 이와 관련된 논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몇몇 연구항목은 현재 진행 중이기도 하다. 거의 잊혀져간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각자 다른 동기가 있을 것이다. 학과체제상으로 보자면, 어떤 이는 중국 현당대문학에서 연구될만한 문제가 이미 그다지 많지 않으므로, 여러해 동안 냉대받아 온 좌익문학, 특히 50-70년대 문학이 많은 탐색거리가 있는 공간임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하에 서재로 들어간 좌익문화는 학원에서 해롭지 않은 학술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 외의 다른 원인은 현대성, 민족국가문학의 명제와의 관련하에 제출된 것으로, 바람직한 문학구상을 위하여 좌익문학의 새로운 해석공간을 개척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서 다수의 인식을 차지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상업주의 문화가 점차 주류문화로 되어가고, 인간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공허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 상황하에, 좌익문화는 이에 맞설만한 이질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재구성의 가치를 지닌 자원이 될 수 있겠는가? 이는 좌익문학의 열정이 회복되기를 희망하며 그에게 활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학은 결코 문학을 자기자신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문학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인간의 생존방식에 관한 것이며, 인간의 현실적 상황에 대한 자각을 환기시키는 것이며, 대다수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적당한 표현방식 찾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현재 좌익문화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목표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아마도 이러한 현상을 중국좌익문화의 재평가 활동으로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재평가는 중국좌익문학에 대한 이전에 있어왔던 단순한 부정에 대한 문제제기이면서도 그러나 그것의 역전환된 형태의 간단한 방식으로 그것을 명의 회복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국좌익문학이 문혁 이후 신속히 쇠퇴하게 된 데에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전체적인 시대의 흐름의 변화를 지적할 수 있겠으나, 그 외에도 그 자신의 존재방식에 문제점이 있기도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좌익문학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부여와 현실적 가치의 발견은 자각적인 반성의 길을 거쳐야만 한다. 문혁기간 동안 좌익문학은 사실 이미 막다른 골목에 처해진 상황이었다. 이러한 곤경은 혁명자체에서 나타난 문제와 연관된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좌익문학에 나타난 위기를 '자아손해(自我損害)'라 부른다. 좌익문학이 8,90년대 신속히 쇠약해진 것은 문학의 범주에서 보자면, 기타문학의 억압의 결과일뿐만 아니라 좌익문학 자체의 자아손해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아손해는 일종의 제도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제도화의 의미는 좌익문학이 자신에 대하여 진행하는 규범화로서, 이러한 규범화는 융통성없는 규칙성으로 전화하며, 제도의 방식으로 강제되고 시행되는 것이다. 좌익문학은 그것의 시작단계에서는 그 원칙과 방법에 독창성을 갖고 있었으며, 기존의 문학형태에 대하여 도전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생동적이고 규범적이지 않은 요소로서 그것의 역량이 결집된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이 중국문학의 주류위치에 진입하면서 지배적인 위치에 오른 이후로 그것은 여타 문학형태에 대하여 절대적인 억압적 힘을 발휘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규범화하였다. 自我馴化(길들이기)는 내부의 활동적이고 변혁적인 사상동력을 지도하면서 생동적인 형식요소를 약화시킨다. 그것의 활력은 점차로 소모된다. 중국좌익문학의 자아규범화는 몇 가지 부분에서 표현된다.

한가지 부분은 문학과 정치, 문학과 혁명사이의 관계에서 이들 사이에 발생할 만한 모순과 긴장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점차로 직접적인 정치미학화의 방식으로 확립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규범화가 또한 사상, 정감, 문학주체, 인물, 생활의 처리방식과 여타 비좌익 정신산물과의 관계에 표현될 때에는 절대와 순수의 추구로 나타난다. 절대와 순수를 추구하는 것은 하나의 완정되고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상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상상과 갈망은 일정하게 경험 특히 감성경험에 대한 불신을 재촉하며, 부단히 자신의 경험 특히 감성으로부터 분리되도록 충동하며 반면에 이론과 개념에 대하여 지나친 집착을 보이게 한다. 이에 40년대 이후부터 좌익문학은 지속적인 자아정화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기타 사상, 문학파별과의 부단한 획분, 분리를 진행하였으며, 결국 순수의 비판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써 좌익문학은 이소당연(理所當然 ; 당연한 이치로써) 현대주의 특징을 지닌 문학유파와 예술경험을 비판하였으며, 상업과 결탁하고 시민계층을 주요한 소비대상으로 상정한 통속소설을 비판하였으며, 일상생활에 관심을 갖고 일상생활로부터 미감을 찾아내려는 문학과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 더욱 주의할만한 점은 이러한 분리가 좌익내부에서도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馮雪峰, 호풍 등 현실에서의 감성경험을 더욱 중시하며 작가 주관정신을 강조한 좌익작가들은 이후 이단으로 간주되어 숙청되었다. 흙은 호풍 일파의 중심어이다. 그들은 발딛고 있는 토지를 중시하고 그것에 친근감을 느꼈다.

『현실주의의 길』(1948)에서 호풍은 『신곡』의 어구를 인용하여 서문을 지었다. "나는 질척한 늪 속으로 뛰어들었네. 갈대와 진흙이 나를 붙잡아 가로막았고, 오래지 않아 나는 넘어졌지. 그리고 나는 내 피가 땅위에 떨어져 호수를 이루는 것을 보았네. 그러나 좌익문학의 주류파는 피, 진흙, 더러운 신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이 신임하는 것은 청결함과 순수함이었으며, 그것들은 단지 개념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중국좌익문학 내부에서 발생하는 지속적인 충돌은 한편으로 순수를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개방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충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장기간 논쟁의 초점이 된 부분이다. 좌익문학은 계열화되고 굳어진 규칙만을 완벽하게 준수해야 하는가, 비판적 현실주의와의 연계가능성은 없는가, 현대주의 혹은 고전문예와 선택적으로 개방될 만한 여지는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한 역사의 대답은 불가능이었다. 좌익문학은 현실의 복잡한 감성생활에서 문제를 제출하기를 거절하였으며, 최종적으로 현실문제에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으며, 현실에 대하여 질문하고 비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었다." 이 글에서 살피고자 한 것은 좌익문학의 생명이다.

그러나 문제의 복잡성은 존재한다. 좌익문학이 만약 자신의 선명한 특성을 갖고서 다른 문학이 해낼 수 없는 해방의 책임을 감당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전통적인 문학형태와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서 변혁적, 도전적인 자태를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좌익문학의 존재이유이다. 그렇지 않으면, 좌익문학은 장차 강대한 전통에 둘러싸여서 침식될 것이며 그것의 독립성을 잃고서 융합되고 동화될 운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사상문학과의 경계를 분명히 유지하고 일체의 불순한 성분으로부터 부단히 자신을 분리해내고, 인류가 창조한 여타 정신적 창조물과의 관련성을 끊어낸다면, 아마도 그것은 활기를 잃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생명력을 잃은 빈 껍데기만이 남게될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 색채를 띈 운명은 오늘날 우리가 좌익문화의 현실적 의의를 사고하는 시점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