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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아시아주의에 대하여 : 중국ㆍ조선/한국ㆍ일본의 어려운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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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아시아주의에 대하여 : 중국ㆍ조선/한국ㆍ일본의 어려운 경험

사카모토 히로코/일본 히토츠바시대 교수

대단히 멍청하게도, 이런 테마가 설정되던 비슷한 시기에 이 테마와 겹치는 저서, 즉 희대라 해도 좋을 만한 대작, 쿄토(京都)대학 교수 야마무로 신이찌(山室信一)씨의 『사상과제로서의 아시아 - 基軸ㆍ連鎖ㆍ投企』(이와나미서점 2001년 12월 14일)가 막 간행된 상태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그걸 손에 들고 망연해지고 말았습니다.

이 책의 구성을 소개하면, 서장 <아시아로의 사상사적 방향전환과 그 시각>에서는 기축ㆍ연쇄ㆍ투기라는 세 개의 시각, 즉 작업가설을 설정하고, 아시아라는 지역세계를, 사상기축에 의해 인식되고 사상연쇄에 의해 연결되어가며 자기가 놓여진 국제질서와 국력 등 현존재로서의 제약 위에서 사상기도(企圖) - 그 현상의 변경을 미래에의 투사로서 기도하는 언동(23쪽)으로서의 - 에 의해 투사ㆍ기획된(projected)공간으로 이루어진 3면성(三面性)의 총체로서 파악하려는 의도가 제시됩니다.

이하, 제1부 <아시아 인식의 기축>]에서 ‘문명’‘인종’‘문화’‘민족’이라는 사상기축이 각국의 역사를 집어가며 설정되고, 제2부<아시아에 있어서의 사상연쇄>에서는 국민국가 형성과 연관된, 중국으로 말하자면 청말(淸末) 이래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의 서학(西學)에 의한 사상연쇄가 테마가 됩니다. 제3부 <투기(投企)로서의 아시아주의>에서는 정책원리ㆍ외교정책으로서의 아시아 언설(言說), 아시아주의 같은 것이 논해지고 마지막 장에서는 <공간 아시아의 존재이유를 둘러싸고> 라는 흥미로운 시사가 있습니다.

이 저서는 마지막 장에서 저자 스스로가 요약하고 있듯이 “17세기에 서양의 세계인식ㆍ학술과 해후한 이래 아시아를 둘러싼 지(知)의 존재양식의 변용을 사상연쇄 그리고 국민국가 형성의 문제와 연결시켜 집어가며 그것을 통해 아시아 내지 동아시아라고 하는 지역사회에 대한 통합의식과 그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적 지(知)가 어떻게 출현해 왔는가, 그리고 일본이 아시아에서 창출해내야 할 정치질서가 어떻게 달라졌는가 등의 문제를 기축ㆍ연쇄ㆍ투기라는 세 가지 각도를 설정해서 검토”(635쪽)한 노작이라고 할 만합니다.

8백여쪽에 걸쳐 거의 단행본 두 권 이상의 분량을, 저자의 전공인 일본정치사상에 머물지 않고 중국ㆍ한국을 중심으로 베트남ㆍ인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전체에 걸친 분석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국사를 포함해서, 오늘날 대세를 점하는 일국의 근ㆍ현대사라고 하는 연구방식에 대한 깊이 있는 비판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고, 새로운 연구모델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의 제약으로 아직 정독할 여유는 없었습니다만 대충 훑어본 한, 역시 장대한 규모의 테마인 만큼 완전무결하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가령 성별(gender)을 축으로 한 시스템이나 천황제 같은 것에 대한 문제화가 빠져있는 점 같은 불만은 있습니다.

또 아시아의 일본 중국 한국 베트남 태국 필리핀 인도 아프가니스탄 인도네시아 등지에 대한 사상연쇄의 특징을 “중국을 결절(結節)고리로 하는 서학의 사상연쇄”의 선행을 전제로 해서 “일본을 결절 고리로 하는” 연쇄가 말하자면 그것에 이어져 있다는 데서 구하고 있는 셈인데, 실제로는 훨씬 다양했을 가능성이 있는 '결절 고리'를 지나치게 일본에 한정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을 개재시킨 한국이라는 문제는 적어도 더 주목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아시아에 대해 이것을 능가하는 광범위한 단행본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야마무로씨의 이 책이 하루빨리 적어도 중국 한국 베트남 영국 등의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공통 토의의 도마에 올려질 수 있다면 이러한 모임에 절호의 재료가 될 것입니다. 이 점을 미리 제언해두는 바입니다.

야마무로씨의 이 책에서도 화두로 삼고 있는 아시아주의를 실마리도 해서 아시아주의가 본래는 아시아연대를 위해 구상되어야 했던 것으로 보고, 역사적으로 사상연쇄의 중요한 '결절 고리'의 하나가 된 일본측에 대부분 기인하는 문제 때문에 불행한 방향으로 수렴되고 만 씁쓸한 경험에 대해 확인해두고 싶습니다.

아시아의 새로운 연대를 모색한다면 그것을 그대로 사상자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채의 유산으로서의 측면을 파악한 위에 그것을 교훈으로 삼고 거기서 사색한 것을 사상자원으로 전화할 수 있도록 다듬어 가는 작업이 되어져야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1. 문화상상(文化想像)으로서의 ‘아시아’**

최근 여러 자리에서 아시아와 동아시아가 화두로 떠올라왔지만 동아시아라는 접근방식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고, 어디가 동아시아인가 하는 공간ㆍ지리적 정의조차 명확치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문화상상의 차원에서 우선 분석을 해둘 수밖에 없겠지요.

아시아든 동아시아든 그 개념이 명확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그리 빠르지 않습니다. 야마무로씨의 연구에서는 일본에서의 가장 빠른 예를 취하자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나 니시카와 죠켄(西川如見)의 ,<증보 화이통상고(增補華夷通商考)> 부록 <지국만국일람지도(地球萬國一覽之圖)>(1708)로, 유럽에 의한 세계구분에 있어서 아시아라는 구분이 사용되게 된 모양입니다(32쪽).

동아시아에 관해서는 특히 전후의 미국의 극동정책에 밀착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이 눈에 띄는데, 어쨌든 이는 원래 서양측에 의한 파악법으로, 그렇게 불리게 된 중국 한국 일본 등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독자적인 동아시아의 상상은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잡지 <포지션스(Positions)>의 편집으로도 알려진 미국인 연구자 타니 발로우(Tani Barlow)씨는 중국의 페미니즘에 있어서의 여성주체의 존재방식을 'in transition(변화해 가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시아개념에 대해서도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동아시아는 정말로 'in transition'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동아시아 개념에는 일본 자신이 빠져있는 경우조차 있고, 중국 한국에서 제시될 때도 베트남을 포함시키는 경우는 아무래도 드문 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 문화상상의 존재양식이라는 문제로서 하나하나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습니다.

중국에서는 문화혁명 종언 후의 1980년대, 유교의 재평가와 뿌리찾기(尋根)가 이루어져 그것은 90년대에 들어서 아시아 경제위기까지는 신흥공업국(NIES)같은 경제신발전국가들이 새삼스럽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움직임 속에서 근대화론의 패러다임을 대신한 유교자분주의론의 대두에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문화적으로 기초화하는 노력으로 ‘문화중국’론을 포함하는 유교문화권 또는 한자문화권구상 등이 한ㆍ중ㆍ일을 중심으로 구축되기도 했음은 기억에 새롭습니다. 근년에는 그러한 문화상상이 아시아ㆍ동아시아 개념을 재구성하기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한 근년의 움직임까지를 사정거리에 둔 아시아론이 필요해지겠지요. 그것을 우선 지적해두고 싶습니다.

***2. 아시아주의의 어려움**

그건 그렇고, 타케우찌 요시미(竹內好)는 아시아주의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생각하는 아시아주의는 어떤 실질내용을 구비한, 객관적으로 한정할 수 있는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경향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시아주의는 다의적이지만 아무리 많은 정의를 모아 분류해봐도 현실적으로 기능을 하는 형태로의 사상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일본의 아시아주의> 1963,타케우찌 요시미)고 한 위에, 아시아주의란 “그러나 아무리 깎아 말한다 해도 아시아 제국의 연대(침략을 수단으로 하든 안 하든)라는 지향을 내포하고 있다는 공통성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객관적인 한정가능성은 물리치면서도 자명한 지역인 듯한 아시아 사이에서의 연대라고 하는 데서 그 본질을 실은 보고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대동아공영권’도 분명 아시아주의의 한 형태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위의 책 294쪽).

나아가 타케우찌는 그러한 논의가 야기하는 비판에 어느 정도 대답하는 형태로 다음 해에는 아시아주의에서 아시아관(觀)으로 테마를 좀 비껴서 역사인식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근대사는 “흥아(興亞)와 탈아(脫亞)의 뒤엉킴으로 진행되고 나중엔 탈아가 흥아를 흡수하는 형태로 패전에 결착되었다”, 바꿔 말하면 “일본에 있어서 아시아의 의미가 당초의 연대감에서 점점 지배의 대상으로 바뀌었다”(<일본인의 아시아관> 1964,105쪽)고 본 것입니다.

이 때 타케우찌의 생각은 패전후 일본의 존재방식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패전으로 일본은 “메이지(明治) 이래 배양된 아시아를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자세”를 잃어버리고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아시아에 책임을 지는 자세”를 방기해버렸다고 유감을 표하면서(上同 95쪽), 대동아전쟁의 침략적 측면을 인정하면서 “그저 침략을 미워한 나머지 그만 침략이라는 형태를 통해 표출되어지고 만 아시아연대감까지를 부정하는 것은 빈대 잡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다”(上同95-96쪽)며 아시아의 연대를 대단히 중시하고 있습니다. 메이지시대를 칭송하며 대동아 세계대전은 부정하면서 새로운 국민주의를 일으켜 세우려 했던 시바 료오타로(司馬遼太郞)와도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타케우찌의 아시아를 둘러싼 사고를 딛고 서서, “현실적으로 기능을 하는 형태로의 사상을 파악할 수는 없다”고 타케우찌에게 판단되었던 아시아주의를 “현실에의 투기(投企)의 사상으로서 파악해보고 싶다”(579쪽)면서, “현실과 이념의 충돌” “국익과 위신의 교착”같은 것들 속에서 파악하려고(22쪽) 하고 있는 것이 야마무로씨입니다.

그는 우선 일본에 있어서 아라이 하쿠세끼(新井白石)의<서양기문(西洋紀聞)>(1715)이 유럽을 ‘서양’이라 이름 부치고 “그것에 대치하는 일본을, 그리고 부수적으로 중국을 동방의 나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36쪽)”는 점에 주목, 일본에서 서양에 대한 동방ㆍ동양이라는 시각이 생겼을 때, 그것이 “일본을 위주로 중국ㆍ한국 등을 포함한 동아시아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36쪽)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지적이 중요하다고 저는 봅니다. 이 점은 일본의 “자의식의 표명이며 자기언급적인” 아시아인식을 일본특수론에 연결시키지 않고 “아시아에 대한 인식의 틀과 개념을 구미에서 받아들였다”고 간주하는 그의 견해에 이어집니다.

야마무로씨는 나아가 유명한 중국의 이대치(李大釗)가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峰)나 코데라 켄키찌(小寺謙吉) 등의 아시아주의를, “중국에 대한 침략주의의 은어(倂呑中國主義的隱語)”이자 “대일본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갈파했던 것(<大亞細亞主義與新亞細亞主義> 1919)에 입각하여, 일본을 위주로 한 아시아관에서는 1)“일본의 아시아주의가 대(對)아시아외교와는 전혀 무관하게, 말하자면 방어적 내셔널리즘으로서 형성되면서, 그것이 확장적 내셔널리즘으로 나타났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즉 일본의 아시아주의란 대일본주의(大日本主義) 자체 또는 일본 내셔널리즘의 다른 표현형태였다”는 것, 2)“일본의 아시아주의는 어디까지나 구미에의 대항으로서 형성된 것이며 요시노 사쿠조오(吉野作造)가 지적하는 것처럼 중국인과 인도인 등 아시아 제 민족의 실태를 기초로 해서 태어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해야할 점으로 제시하면서, “오카꾸라 텐신(岡倉天心)이 갈파했듯이 아시아는 그 자체로서 일체는 아니며 유럽에 대한 굴욕에 있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630-631쪽)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상이 야마무로씨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시아주의가 일본의 식민지통치에 직면한 조선에 있어서조차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분위기 속에서 신채호(申采浩)가 한국인이 열국(列國)경쟁의 시대에 국가주의를 제창하지 않고 동양주의의 미망에 현혹되는 것은 시의에 적절치 않다(<東洋主義에 대한 비평>)고 격렬하게 비판한 것도 소개하고 있습니다(631쪽).

이러한 타케우찌와 야마무로씨의 대(對)아시아주의 논의를 나란히 놓고 보면, 야마무로씨 쪽이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카꾸라 텐신(岡倉天心)에 대한 높은 평가라는 점에서는 공통됩니다. 타케우찌는 “텐신이 ‘아시아는 하나’라고 말한 것은 오욕으로 점철된 아시아가 본성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로맨틱한 ‘이상’으로 이야기한 것”(<일본의 아시아주의> 330쪽)이지, 제국주의를 찬미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확실히 오카꾸라 텐신이 기도한 미술계의 재야 아카데미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메이지정부ㆍ국가였고 그것이 오카꾸라를 분노케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중국이든 인도든 아시아국가 각자의 문화와 미(美)라는 것에 대한 인지의 필요성을 호소하며, ‘아시아적 양식’의 옹호를 회복할 것을 희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문화의 특권화 의식 또한 강경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복잡 속의 통일을 특히 명백하게 실현하는 것은 일본의 위대한 특권이었다. 이 민족의 인도ㆍ타타르적인 피는 그 자신을 인도ㆍ타타르라는 두 가지 원천으로부터 길어 올려, 이렇게 아시아 의식 전체를 반영할만한 존재가 되게 한 유전이었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을 모신다는 비할 데 없는 축복, 정복당한 적이 없는 민족의 자긍심, 팽창발전을 희생시키면서 조상전래의 관념과 본능을 지켜온 섬나라적 고립 등이 일본을 아시아의 사상과 문화를 위탁할 진정한 저장고가 되게 했다”(1903 영역본 간행,<동양의 이상> 타케우찌 요시미편, 현대일본사상대계<아시아주의> 筑麻書房1963 수록 일본어판 사용, 이하 동일, 69쪽),

“아시아문화의 역사적 풍부함을 그 비장의 표본에 의해 일관되게 연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일본에서 뿐이다”(上同). 천황제가 메이지시대에서 패전까지의 기간을 빼고는 노골적인 정치권력으로서보다는 오히려 문화장치로서 기능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문화적 특권의식 우월주의가 내포한 문제는 실제 커다란 것이 아닐까요. 타케우찌, 야마무로 둘 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또 한 사람, 60년대 일본의 지적 상황 속에서 근대비판은 물론 근대초극론(近代超克論)과 함께 높은 평가를 받게된 아시아주의론자 타루이 토오키(찌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초고1885년, 1893년 한문판 간행)의 평가문제를 제기해보겠습니다.

1870년대 후반 조선개혁을 위해 일본정보의 수집을 개시한 김옥균은 1882년 일본을 방문, 후쿠자와 유키찌(福澤諭吉) 등과 함께 이 타루이와도 면담을 하고 있습니다. 타루이의 <대동합방론>은 “ 한일 양국으로 하여금 하나의 합방이 되게 할” 취지로 쓰여졌는데 당시 왕성해져가고 있던 사회진화론적인 인종ㆍ문명관의 색채가 짙은 논의입니다.

서양인에게 중시된 두 강대국은 청나라와 일본으로, “동아는 다행히 이 두 강국이 있어 우리 황인종의 위엄을 지키고 있다. 만일 황인 중에 이 두 나라가 없었다면 저 백인종은 바로 아시아 전체를 유린하고 우리 형제 황인종들을 노예로 하는 것이 아프리카 흑인과 다를 바 없었을 것”(타케우찌 요시미 편역 <아시아주의> 수록, 124쪽)이라며, 청일전쟁 패배후의 담사동(譚嗣同) 등 개혁논자의 논을 방불케 하는 黃鐘의식의 강경함이 이미 들어있습니다.

누습이 인민을 바보로 만든다는 인용으로는 예를 들어 “대만의 야만인은 인육을 먹고 그 해골을 공훈의 휘장으로 한다”(上同113쪽)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한일합방을 추구하는 것은 조선이 가난하고 약하긴 해도 “그 면적은 우리나라의 절반”, “조선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지키는 것” “조선의 이익이 일본의 이익”이라는 등 연대보다는 이해(利害)가 목적이었음이 명백합니다. 야마무로씨는 “황색인종의 연대에 의한 백색인종과의 대항이라는 논의도 황색인종의 내부에서 보면 서열화와 일본의 맹주적 지위가 전제되어 있었던 것”(61쪽)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편 타케우찌의 타루이 평가는 놀랄 만치 높습니다. “타루이는 설마 후년 자신을 침략사상의 동반자로 끌어들일 사상가가 나타나리라고는 예상치 못 했을 것이다. 한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또 한국의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열강의 침략을 공동방어하기 위해, 한일 양국이 평등합병하자는 주장은 타루이가 자부하고 있었듯이 그의 창견(創見)이었고 더욱이 절후의 사상이 아닐까 생각한다”(321쪽)고 되어있습니다.

물론 잊혀진 타루이를 발굴함과 동시에 왜곡한 히라노 기타로(平野義太郞)에 대한 강한 비판, 계승자인 우찌다 료오헤(內田良平)에 의한,일진회(一進會)를 이용함으로써 “대등합장(對等合邦)이 냉혹한 일방적 합병으로 끝나지 않을 수 없었던” 문제에 대한 인식이 타케우찌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소박한 아시아주의자들”이라고 평하는 타케우찌 속에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동질의 소박함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시아주의의 함정으로서 우리들이 배워야 할 점이 여기 있을 것입니다.

***3. 아시아 연대의 실험**

여기서 우리들에게 있어서의 아시아 연대를 생각하기 위한 연습문제로서 신해혁명 전의 1907년, 도쿄에서 실현된 새로운 아시아 연대의 케이스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소보(蘇報)>사건으로 투옥, 출옥 후에 혁명동맹회의 안내로 도일(渡日)한 혁명가 장병린(章炳麟)은 유사배(劉師培) 장계(張繼) 등과 민족주의연구를 계기로 한 사회주의 강습회, 또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전全아시아 독립을 목표로 하는 아주화친회(亞洲和親會) 조직에 가담합니다.

후자에는 사카이 토시히꼬(堺利彦)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오오스기 사카에(大杉榮) 등 일본의 사회주의 관계자 이외에도, 본국에서는 반영(反英) 국산품운동이 전개되어 가면서, 러일전쟁으로 일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인도, 나아가 베트남,필리핀으로부터의 참가자도 얻어 제1차 회합이 재일(在日) 인도인 활동가들의 근거지, 도쿄 아오야마(靑山)의 ‘인디아 하우스’라고 불리는 임대가옥에서 열렸었다고 합니다.

당시 많은 중국인 유학생이 도쿄에 모여 이 곳이 혁명의 정보센터가 되기도 했었고, 자금면에서 화교의 원조도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도로부터는 봄베이 항로개통으로 인도-일본 간 무역도 시작되었고 재일 인도교포가 반영 망명 인도인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도쿄에서 화교 네트워크와 인교(印僑) 네트워크가 교차하는 곳에 일본의 좌익 아나키스트들 역시 다른 아시아 활동가들과 모여들어 보기 드문 아시아 피압박민족연대가 아주 단기간이나마 성립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메이지시대 이래 일본 주도의 아시아주의적인 조직은 뒤가 수상쩍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연대의 실험은 획기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당시는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하고 있던 시절이라, 일본인에 대한 불신감으로 조선인의 관여는 있어도 회합에의 참가는 없었다고 합니다. 충분히 성공한 케이스라고는 하기는 어려우나 이 아시아연대의 실험을 사상자원(思想資源)으로 해나가야 되지 않을까요?

장병린(章炳麟)은 1917년에도 상하이 일본인구락부에서 “아시아의 우호단결, 고대철학 연구를 취지로 하는”아주고확회(亞洲古學會)를 저널리스트 니시모토 쇼오조(西本省三) 등과 조직한 다음, 니시모토의 통역으로 상하이를 방문한 아쿠타가와 류우노스케(芥川龍之介)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章)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일본인은 도깨비 섬을 정벌한 모모타로(桃太郞)다. 모모타로를 사랑하는 일본 국민에게도 다소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1924 <편견>,1996『芥川龍之介全集』제11권, 岩波書店 수록 199쪽)고 아쿠타가와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1921년 상하이에서의 장병린(章炳麟)과의 만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상해유기(上海游記)>(1921)에서가 아니라, 1924년이 되어 그는 이 ‘모모타로’(같은 해, 同名의 창작이 있음) 이야기를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본침략에 대한 이 통렬한 비판이 과연 장병린의 말에 있었는지 여부는 3년 후에 덧붙여 기록된 것인 만큼 확증은 없습니다. 그러나 설사 그것이 허구였다 할지라도 동시대의 아쿠타가와芥게 그렇게 받아들이게 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필 반영 민족운동에 있어서 인도인 통합의 상징으로도 이용되었던 시바지(Shivaji) 제전에서 오오쿠마 시게노부가 인도ㆍ중국인들을 앞에 두고 “아시아문명에서 지금은 일본이 제일”이라고 말한 데 대해 장병린(章炳麟)은 그의 “뻔뻔스러움(無恥)”을 비웃으며, 인도인의 말이라며 “일본이 흥성할 때까지 아시아 제국은 작은 불화는 있었을지언정 그럭저럭 평화로웠는데, 지금은 그 반대”(<印度人之觀日本>『民報』20, 1908)라고 적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뻔뻔스러움(無恥)”를 면하기 위해서는 기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본에 있는 우리들이 교훈으로 했으면 합니다.

***보충 제안**

시간제약으로 보잘 것 없는 글밖에 준비를 못했습니다만, 이 작업을 통해 새삼 작은 제안을 해두고 싶었습니다.

역사적인 아시아주의의 출현을 볼 때, 일본이 주동이 된 아시아주의란 결국 대동아공영권 구상에 수렴되지 않고 끝난 것은 없었다고 인식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 그러나 타케우찌가 종래의 근대주의적 혹은 좌익적 아시아주의비판을 다소 조급하게 아시아 이탈에 연결 지어, 당시의 기성좌익에 대한 비판으로 하기도 했던 문제는, 오늘날 보아 사상처리의 문제로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시아에 있어서 중ㆍ일이라든가 한ㆍ중ㆍ일이라든가 하는 국가간 연합과 그에 다른 배제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아시아를 그야말로 in transition의 상태로 열어두고, 역사적인 아시아연대의 존재방식을 포함해서 상호비판을 통해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기초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역사에서 배운다면, 목하 한층 그러한 연대창출을 일본에서, 특히 정부를 끌어들여서는 더더구나 하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람직한 아시아를 향해 수렴되어 가는 것보다는 무언가 열려있는 방향으로(이것은 경제 글로벌리즘과 손잡은 경제진출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만), 우선 상호비판의 공간이라는 것을 아시아실험으로서 만들어 나갔으면 합니다.

그것이 아카데믹한 장에 한정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일본의 교과서문제와 아시아의 교과서 국정(國定) 같은 문제, 전후 배상문제 등도 외교문제와 직결하는 방향은 우선 피하면서 점차 공개되어 가는 문서자료 등을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제시하며 사상자원으로서 제공할 수 있는 것처럼, 아카데믹한 장과 관련된 곳에서도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홋카이도대학의 카와시마 마코또(川島眞)씨에 의하면 장개석 국민당의 배상요구에 대해 전후 피해조사가 이루어졌었다는 사실과 배상 포기를 불가피하게 했던 국제정세라는 연구보고에서도, 전쟁문제도 좁게 가해ㆍ피해 당사국으로만 생각하는 것보다는 보다 넓은 장에서 연구하고 토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아카데미즘이란 종래와 같이 세분화된, 여전히 조그만 구멍으로 한번 들어가면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는 문어항아리가 되어버린 상태로는 대처가 안되니까 그것을 또 어떻게든 바꾸어 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아카데미즘이 되겠습니다.

일본의 대학개혁도 그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 터라, 서둘러 그러한 목소리를 내고 바람직한 다양한 해결의 가능성을 찾아갔으면 하는 바입니다.

번역 / 任 明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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