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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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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70>

제6강 논어(論語)-29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雍也)

이 구절도 위에서 설명한 구절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적(動的)이고 이자는 정적(靜的)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

고주(古註)와 주해(註解)에 나타난 이 구절의 설명을 몇 가지 읽어보지요.

“물이란 순리를 좇아가면서도 작은 빈틈도 남겨두지 않고 채우는 것이 지자(知者)를 닮았고, 움직일 때는 아래에 처하는 것이 예절바른 사람을 닮았고, 깊은 곳으로 떨어지면서도 주저함이 없으니 이는 용자(勇者)를 닮았고, 방해물을 만나 갇혔을 때는 스스로를 맑게 하니 이는 천명을 아는 자(知天命)를 닮았고, 중도에 꺾이지 않고 마침내 목적지에 이르니 이는 덕있는 자를 닮았다. 천지는 물이 있으므로 이루어지고, 많은 무리의 생물은 물이 있으므로 평온을 누리는 바, 이러한 이유로 지자는 물을 좋아하는 것이다.” (韓嬰 ‘韓詩外傳’卷三)

“산은 우뚝 높이 솟아 있다. 높이 솟아 있다고 좋아하는가. 산은 초목이 그곳에서 자라고, 새와 짐승들이 그곳에 모여들고 그곳에서 번식하고, 온갖 재물이 그곳에서 번식하는데, 산은 그것들을 낳아 자라게 하면서도 그것들을 자기 소유로 여기지 않는다. 사방에서 산에 있는 것들을 베어 가는데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고 기꺼이 내어 준다. 산은 구름과 바람을 만들어 내어 하늘과 땅 사이를 소통시켜 양(陽)과 음(陰)의 기운이 화합하게 하고, 비와 이슬을 내려 만물이 살아가게 하는데, 백성들은 그것을 먹고 살아간다. 이러한 이유로 인자는 산을 좋아하는 것이다.”(‘孔子家語’. ‘尙書大典’)

“인자(仁者)는 의리(義理)를 지키는 것으로 편안히 여기고 그 성품이 중후하여 쉽게 옮겨가지 않는다. 이는 산의 성질과 비슷하므로 그래서 인자는 산을 좋아하는 것이다.”(朱子 ‘四書集注’)

“지자(知者)는 자신의 재주와 지혜를 사용하여 사물에 민첩하게 대처하는 것을 즐기는데, 이는 물이 쉬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과 같으므로 동적(動的)이라 하였고, 인자(仁者)는 산처럼 느긋이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편안히 여기고 즐기는데, 자연은 움직이지 않으므로 비로소 만물이 그곳에 터잡고 살아갈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정적(靜的)이라 한 것이다.”(包咸 ‘論語章句’)

“인자가 오래 사는 것은 밖으로는 탐내는 것이 없고, 안으로는 청정한 삶을 살고, 마음은 화평하여 중정(中正)을 잃지 않으며, 천지 가운데서 좋은 것은 취하여 그것으로 자기 몸을 기르기 때문이다.”(董仲舒 ‘春秋繁路’ ‘循天之道‘)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너무 고루(固陋)하지요? 나로서도 매우 답답하게 느껴지는 대목이 한 두군데가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옛사람들의 생각을 접해보는 일입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정서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입니다. 고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면서도 지자(知者)와 인자(仁者)를 비교하는 옛사람들의 관점이 상당부분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산(山)과 수(水)와 사람에 대한 매우 근본주의적인 생각을 알게 됩니다.

내 경우에는 원문과 주석들을 읽는 동안에 지자와 인자의 이미지가 어렵풋이 형상화됩니다. 지자(知者)는 눈빛도 빛나고 사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특히 사물의 변화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자(仁者)는 일단 앉아 있는 사람으로 형상화됩니다. 지자(知者)가 서 있거나 뛰어 다니는 사람임에 비하여 인자(仁者)는 한 곳에 앉아서 지긋이 눈감고 있을 듯 합니다.

작위(作爲)하지 않고 오히려 무위(無爲)의 나날을 보낼 것 같은 인상이지요. 수고롭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러한 비유가 너무 문학적인 설명입니까? 여러분도 아마 형상화하고 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인자(仁者)는 한마디로 관계망(關係網)의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지자(知者)는 개별적인 사물들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그물코에 대하여 이해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엉뚱하게도 지자(知者)의 모습과 함께 알튀세르(L. Althusser)를 떠올리게 됩니다. 특히 그의 상호결정론(over determination)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 있어서 일방적이고 결정론적인 인과관계(因果關係)를 지양하고자 하는 그의 정치(精緻)한 논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반면에 인자(仁者)는 오히려 노장적(老莊的)이기까지 합니다. 개별적 관계나 수많은 그물코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세계를 망라하는 그물, 즉 천망(天網)의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인자(仁者)는 최대한의 관계성(關係性)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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