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에도 이야기하였듯이 위 구절에서 여러분들은 상품미학의 허구성을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온통 상품미학에 포섭되어 그로부터 우리의 감수성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 현대의 문화적 상황입니다.
상품(商品)은 교환가치의 획득을 목적으로 합니다. 경제학 교과서에는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통일물로 설명하고 이를 상품의 이중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상품은 교환가치가 본질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상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팔기 위한 것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에 필요한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다시 ‘논어’의 구절로 돌아가서 문질(文質)개념으로 이야기합시다. 상품의 사용가치는 내용(質)이고 교환가치는 형식(文)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문질(文質)이 빈빈(彬彬)하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상품에 있어서는 그 형식이 전체를 규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상품의 내용인 사용가치는 소비되는 시점에서 판단됩니다.
그에 반하여 구매행위는 소비 이전에 일어납니다. 그것은 상품의 브랜드, 디자인, 컬러, 포장 등 외관 즉 형식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광고 카피 역시 소비자가 소비보다 먼저 만나는 약속입니다. 광고는 그 상품이 담고 있는 사용가치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소비단계에서 허위성이 드러납니다. 이 약속이 배반당하는 지점 즉 그 형식의 허위성이 드러나는 지점이 패션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반론이 없지 않습니다. 반품(返品)과 AS가 뒤따른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자(瑕疵)에 대한 보상입니다. 광고 카피의 허구성을 뒤집는 것이 못됩니다.
더구나 사용가치를 먼저 만나게 하는 장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즉 상품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며 더구나 상품생산구조 자체에 대하여 하등의 영향도 줄 수 없는 것이지요. 결국 형식만으로써 구매를 결정하게 하는 시스템의 보조적 기능에 불과한 것이지요.
반품과 AS 자체가 또하나의 상품으로 등장하여 허구적인 약속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역설적이지요. 결국 많은 사람들이 그 배신(背信)의 경험 때문에 상품을 불신하고 나아가 증오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의 패션은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여 또 다른 패션으로 전이(轉移)합니다. 그러다가 한바퀴 돌아서 다시 오기도 하지요.
어쨌든 패션은 ‘변화 그 자체’가 됩니다. 상품문화와 상품미학의 본질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새로운 것에 대한 가치, 그리고 변화의 신선함이라는 메시지는 실상 환상(幻像)이고 착각(錯覺)이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상품사회에서 도달할 수 있는 미학과 예술성의 본질이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상품사회에서 우리가 키우고 있는 감수성과 정서가 이러한 내용을 갖는 것이지요.
상품을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세포(細胞)라고 합니다. 세포의 본질이 사회체제에 그대로 구조화되는 것이지요. 형식(形式)을 먼저 대면하고 내용(內容)은 결국 만나지 못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문(文)이 승(勝)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表面)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사용가치가 아예 없는 상품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브랜드만으로 운영되는 회사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굴지의 세계적인 회사로 군림하고 있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點)에서의 만남입니다.
위나라 대부인 극자성(棘子成)이 말하기를 “군자는 본바탕이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문식(文飾)을 할 것이랴”(君子 質而已矣 何以文爲)하였습니다. 당시에도 오늘날과 비슷한 상황이었던가 봅니다. 상당히 과격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자공(子貢)이 반론했습니다. “애석하구나. . . . 문채는 본바탕이요 본바탕은 문채이니 (만일 무늬가 없다면) 표범의 털 뽑은 가죽이 개와 양의 털 뽑은 가죽과 무엇이 다르랴”(文猶質也 質猶文也 虎豹之鞹 猶犬羊之鞹)고 하였습니다. 곽(鞹)은 털을 뽑은 가죽을 말합니다.
자공의 반론은 내용과 형식은 분리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춤과 춤추는 사람을 어떻게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분리는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고루 조화되어 빈빈(彬彬)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형식도 경시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형식이 내용을 채우게 되는 경우도 많지요. 때에 따라서는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극자성이 당시의 폐단을 바로 잡으려고 다소 과격한 논리를 편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잃음이 지나치고 자공이 또 자성의 폐단을 바로 잡으려 하나 근본과 끝, 무거움과 가벼움을 구별하지 못하였으니 잃음이 또한 크다”고 주해(註解)를 달고 있습니다.
주자(朱子)는 문(文)이 이기는 것이 질(質)을 멸(滅)함에 이르면 근본이 망할 것이니 사(史)한 것보다 차라리 야(野)한 것이 낫다고 개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史)와 야(野)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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