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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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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67>

제6강 논어(論語)-26

‘논어’는 전에도 이야기하였습니다만 나로서는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의 보고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고대국가가 출현하는 시기이며 따라서 당시의 백가(百家)들은 당연히 사회론에 있어서 쟁명(爭鳴)을 하였지요.

‘논어’는 그러한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붕(朋)이건 예(禮)건 인(仁)이건 사회는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가 근본이라는 논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사상에 비하여 ‘논어’가 갖는 진보성의 근거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논리는 계급관점이 결여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은 계급적 개념이며 ‘논어’는 오히려 주(周) 봉건제하의 노예적 질서를 옹호하고 있는 사상이라고 비판을 받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하여는 논의가 무성합니다만 다시 논의하기로 하지요.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많은 전문 연구자들이 논의를 계속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과거의 사상을 비판할 경우 우리가 가장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비판의 시제(時制)입니다. 고대사상을 오늘의 시제에서 평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당대사회의 제반조건(諸般條件)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상은 역사적 토대를 갖는 것이지요.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묻히는 것이지요. 모름지기 당시(當時)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온당한 것이지요.

우리는 다만 논어가 인간관계론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관계론은 주대(周代)의 종법질서(宗法秩序)를 뛰어넘는 세계라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논어’에 대한 접근경로도 그런 쪽으로 한정하려고 합니다.

그렇더라도 ‘논어’에 관한 예제(例題)를 더 많이 다루어야 합니다만 그러지 못합니다. 몇 가지만 더 이야기하면서 마무릴 하기로 하겠습니다.

옹야편(雍也篇)에 있는 다음 구절은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적 통일에 관한 논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이 구절을 상품미학(商品美學)에 대한 반성으로 읽어주기 바랍니다.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 君子(雍也)

質(질) : 내용, 바탕 文(문) : 형식, 문채
勝(승) : 이기다. 지나치다. 過하다.
野(야) : 거칠다. 史(사) : 사치스럽다.

“바탕이 문채(文彩)보다 승(勝)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내용과 형식의 통일에 관한 것입니다. 승(勝)하다는 표현은 물론 지금은 쓰지 않지요. 그러나 과거에는 매우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말이었지요.

이 구절에서 ‘승(勝)하다’는 말은 여러분의 언어로는 ‘튄다’로 해석해도 되겠네요. 내용이 형식에 비하여 튀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 그런 의미입니다.

이 경우 내용을 행(行), 형식을 언(言)으로 바꾸어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사람과 의상(衣裳), 실천(實踐)과 사상(思想) 등 여러 가지 경우에 우리는 이러한 범주적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쪽 측면이 튀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든지 경험하고 있지요. 세상에는 내용도 없는 이야기를 매우 아름답게 잘도 풀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값으로 매기는 것이 무리입니다만 사람보다는 훨씬 비싼 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주장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말없이 어떤 일을 이루어 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보다 못한 옷을 입고, 사람보다 작은 집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광고 카피의 문장과 표현이 도달하고 있는 그 형식에 있어서의 완성도(完成度)에 대하여는 누구나 감탄하고 있는 일이지만 광고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는 소비자는 없습니다. 상품의 질이 그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경우 사치스럽다(史)고 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사회운동단체의 성명서는 광고 카피의 반대측의 극한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만으로 승부하려고 하지요. 도덕성과 정당성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주장을 제시하는 형식이 심히 거칠기 짝이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표현하는 형식과 언어를 적절히 절제함으로써 훨씬 더 진한 감동을 이끌어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격을 떨어트려 놓아 아쉬움을 금치 못하는 경우 많지요. 질이 승하여 거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 같습니다만 이 구절은 내 경우에는 붓글씨 체와 관련이 없지 않습니다. 서도(書道)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문제입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씨체를 민체(民體)다, 연대체(連帶體)다, 어깨동무체다, 심지어 유배체(流配體)라고도 합니다만 나로서는 매우 고민한 글씨체입니다. 나는 한글의 글씨체는 물론 오랫동안 궁체(宮體)와 고체(古體)를 바탕으로 하여 썼었지요.

고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특이나 궁체의 경우 더욱 그 특징이 쉽게 눈에 뜨입니다. 궁체는 궁중에서 궁녀들이 쓰던 글씨체에서 유래합니다. 여러분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귀족적 형식미가 추구되고 있습니다.

정연(整然)하고 하체(下體)가 연약하면서 전체적으로 정적(靜的)인 그러한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학(美學)을 가지고 있는 궁체와 고체는 물론 시조(時調)나 별곡(別曲) 성경구(聖經句) 같은 내용을 쓸 때는 그 내용과 형식이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내가 자주 썼던 민요나 민중시를 그러한 형식에 담았을 때는 내용과 형식이 전혀 어울리지 못하였지요. 신동엽, 신경림, 박노해 등 민중적 정서와 서민적 가락을 담기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글씨체였습니다. 마치 된장찌개를 유리그릇에 담아 놓은 것같이 내용과 형식이 불화(不和)를 빚지요.

이러한 반성이 계기가 되어 글씨를 쓸 때는 항상 이 구절을 생각하게 되지요. 지금도 글씨의 형식과 내용을 조화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글씨에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서 지지부진 답보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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