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신영복 고전강독 <65>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신영복 고전강독 <65>

제6강 논어(論語)-24

子曰 孟之反 不伐 奔而殿 將入門 策其馬 曰 非敢後也 馬不進也 (雍也)

孟之反(맹지반) : 魯나라 대부. 이름은 칙(側)
伐(벌) : 자랑하다. 誇功. 奔(분) : 패주(敗走), 퇴각(退却). 패퇴(敗退).
殿(전) : 軍後. 後備를 맡음(앞에서 인도하는 것을 啓)
策(책) : 鞭. 채찍으로 때리다.

“맹지반은 자랑하지 않는다. 퇴각할 때는 (가장 위험한) 후미(後尾)를 맡았다. 그러나 막상 성문에 들어올 때는 (화살을 뽑아) 말에 채찍질하면서 ‘내가 감히 후미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말이 나아가지 않아서 뒤처졌다’고 하였다.”

애공 11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원주(原註)에서는 맹지반의 이러한 겸손과 사양의 마음을 평하여 윗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욕심이 날로 사라지고(人欲日消) 하늘의 이치가 날로 밝아진다(天理日明)고 하였습니다.

맹지반이 후비(後備)를 맡은 공(功)을 숨긴 까닭은 전쟁에서 패하여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전승(戰勝)이나 개선(凱旋)의 경우에는 후비를 맡을 필요가 아예 없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원주(原註)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공(功)을 숨기고 겸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욕심(慾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하늘의 이치가 날로 밝아지는 것이지요.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명석한 판단은 무사(無私)에서 오는 것이라 합니다. 천하를 도모하려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음은 물론, ‘윗사람이 되려고 하는 욕심’마저도 없었지요.

이처럼 무사(無私)하기 때문에 공평(公平)할 수 있고 공평하기 때문에 이치가 밝아질(天理明)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집단이기주의와 이해관계집단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그 주장과 논리가 사사로운 것이기 때문이지요.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전번 강의에서 진리란 참여(參與)이며 조직(組織)이라고 이야기한 사실을 들어 지금의 이야기와 모순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리가 참여의 방식이며, 진리는 조직되는 것이라면 참여점(entry point)에 있어서의 입장(立場)과 당파성(黨派性)은 당연히 무사(無私)함과 모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진리는 무사(無私)할 수 없는 법이지요.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분도 준비를 해서 다시 시간을 내어서 논의하기로 합시다. 이것은 공(公)과 사(私)의 경계(境界)에 관한 논의이면서 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의 문제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논의는 공자가 맹지반의 예를 들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에 한정하기로 하지요. 자기의 공(功)을 숨기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함을 뒷받침하는 것이 무욕(無慾)과 무사(無私)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욕과 무사에서 우리의 논의를 끝낸다면 그것은 너무나 상투적인 윤리학에 갇히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과(功過)를 불문하고 아무리 교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숨기더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며 공치사(功致辭)란 결국 공치사(空致辭)로 전락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지요.

그래야 비로소 겸허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경우에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명석합니다. 이 말에 대하여 아마 쉽게 동의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다소 추상적인 이야기로 들릴 지 모르지만 “타인이란 항상 자기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하여도 쉽게 동의하지 않을 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여러분은 지금 나보다 낮은 자리에 앉아서 주로 내 강의를 듣고 있지요? 여기 교단에 서 있는 내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여러분이 매우 유리한 위치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입니다.

나도 학생 때에는 지금 여러분이 앉아 있는 위치에서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었지요. 그 때 느낀 것입니다만 학생이란 위치 즉 교단 아래에 턱받치고 앉아 있는 바로 여러분의 자리는 선생의 일거수 일투족이 너무나 잘 보이는 자리라는 사실이었어요.

강의내용을 이해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강의내용에 대한 선생 자신의 이해 정도가 너무나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것이었어요. 마치 맨홀에서 작업하는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치부(恥部)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모든 타인(他人)은 그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집단적 타인(他人)인 대중(大衆)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중은 현명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격입니다.

우리가 명심하여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더 하지요. 교도소는 거짓말이 판치는 곳입니다만 동시에 거짓말이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곳입니다. 같은 감방에서 오래 동안 함께 생활하는 곳이기 때문에 거짓말이 언젠가는 탄로가 나게 마련입니다.

일단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그 거짓말과 상충되는 말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거짓말을 했을 때 누구누구가 그 자리에 있었는가를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거짓말이 탄로 나지 않기 위하여는 거짓말과 거짓말이 행해진 환경을 동시에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이 거짓말에 노출되는 사람의 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납니다. 도대체 감당이 불감당이지요. 아무리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지방신문사 기자였다고 으스대던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만 탄로가 났어요. ‘인터뷰’를 ‘인터폰’이라고 했다는 풍문이 들려 왔지요. 그래서 어느 날 누군가가 다시 확인했지요. “누구를 인터폰 했다고?” 그 작자는 “ooo를 인터폰 했다”고 분명히 대꾸했습니다. 막상 당자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였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 확인사살 당하였지요. 교도소의 강점(强點)이지요.

여기에 비하여 오늘날의 우리사회는 거짓말의 수명이 상당히 긴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할 필요가 별로 절실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실상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