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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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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62>

제6강 논어(論語)-21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里仁)

이 구절을 뽑아서 함께 읽는 이유는 여러분이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믿습니다.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의 가치중립성(價値中立性)에 대한 환상을 지적하자는 것이지요.

이 구절의 해석에 다소의 이견이 있습니다. 가장 널리 통용되는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것을 누리지 않으며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해석상의 이견이 있는 부분은 ‘불이기도득지(不以其道得之)’입니다. “그 도로써 얻지 않은 것”이란 뜻입니다. 부정(不正)한 방법으로 얻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는 쉽게 이해가 가지만 빈천(貧賤)의 경우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닌 빈천이 과연 어떤 것인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지요.

그래서 다산(茶山)은 이 경우의 득(得)을 탈피(脫避)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한 벗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해석이 이를 따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도로써 얻은 빈천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꼭 빈천은 아니라 하더라고 처음부터 부귀와 상관없는 삶을 선택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그 도로써 얻은 빈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부귀를 얻기 위하여 부정한 방법에 의존했다가 빈천하게 되는 경우가 이를테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 도로써 얻지 않은 빈천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빈천은 불거(不去)해야 하는 것이지요.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고 싶은 이유는 빈천을 무조건 탈피해야하는 것을 전제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빈천도 얼마든지 도로써 얻을 수 있는 어떤 가치라는 것을 선언하고 싶은 것이지요.

어느 경우든 우리가 이 글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부귀와 빈천에 대한 반성입니다.

부의 형성과정이 정당한 것인가? 그 사람의 출세가 그 능력에 따른 정직한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물음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보편적인 시각은 오로지 그 결과만을 두고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빈천의 경우도 그것을 당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세태입니다. 게으르다거나 낭비적이라거나 하는 것이 그런 시각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귀와 빈천을 그 역사와 과정을 통하여 이해하는 자세입니다. 개인의 경우 몇몇 재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부귀의 형성과정에 대하여 전혀 무지합니다. 특히 서울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고향에 내려가면 그 곳에서는 선명하게 보입니다. 조선조 말에서부터 일제하 해방후 자유당 공화당 신한국당을 거쳐오면서 그와 그의 가계(家系)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역사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지금 소유하고 있는 전답과 건물의 소유주(所有主)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대다수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줄곧 고향에서 살아오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주로 나누는 대화가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과 역사가 드러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친일파가 처단되지 않은 역사를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하지요. 그 과정과 역사는 완벽하게 은폐되고 그 결과와 성과만을 바라보게 하는 사회를 우리가 살고 있지요.

개인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이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대사회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한마디로 억압과 수탈의 역사입니다. 21세기의 평화를 갈망하던 우리들의 소망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의 부귀(富貴)에 대하여 그 과정(過程)과 그 도(道)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 무지(無知)합니다.

우리가 근대기획 즉 선진자본주의를 국가적 목표로 하여 매진하고 있는 한 자본주의의 과정은 은폐되는 것이지요. 모든 침략과 수탈이 합리화되고 미화(美化)되고 선망(羨望)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역사의식과 이러한 사회의식 속에서 부귀와 빈천의 온당한 의미를 읽어내기란 매우 어렵지요.

집안의 어른 중에 보학(譜學)이라는 문화전통을 복원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분이 계시지요. 그래야 자손을 위해서라도 부정한 방법으로 부귀를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보학(譜學)에 의하여 될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사회의 관계망과 역사의 관계망, 즉 사회 역사적 관계망(關係網)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과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 근본적인 과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들의 천민적인 의식에 대한 반성도 그에 못하지 않을 만큼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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