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德不孤必有隣(里仁)
“덕(德)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또는 이웃이 생긴다.”
별로 어렵지 않은 글입니다.
백범(白凡)선생이 평소 자주 인용한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그것입니다.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미모(美貌)보다는 건강(健康)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당신을 미남(美男)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보다고 이 글을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건강(身好)은 실생활(實生活)에 있어서 미모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더구나 백범처럼 풍찬노숙(風餐露宿)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독립운동에서는 더욱 그러하였으리라고 짐작됩니다.
백범의 이 구절에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를 추가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읽은 글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신체가 건강한 것보다는 마음 좋은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옳은 말입니다. 노신(魯迅)이 의사(醫師) 되기를 포기하고 문학(文學)으로 진로를 바꾼 이유가 바로 이 신호(身好)와 관계가 없지 않습니다.
일본 유학시절에 노신은 건장한 중국청년이 러시아의 첩자라는 혐의를 받고 일본인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러일전쟁 당시의 일이었습니다.
그 건장한 청년의 모습에서 크게 뉘우쳤기 때문이었어요. 노신은 우매한 정신의 각성이 더욱 시급한 중국의 과제라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일생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중국인의 정신의 각성을 위하여 치열한 일생을 살아갑니다.
심호(心好)를 정신이나 사상의 의미로 읽지 않고 마음씨 또는 인간성의 의미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미모(美貌)의 기준을 외형적 형식미에 둘 경우 사흘이 안 간다는 것이지요.
변화 그 자체에 몰두하는 오늘의 상품미학(商品美學)에서는 더욱 덧없는 것이지요. 마음(心)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러한 관계에 대한 각성을 정서적인 수준에 이르도록 완성해 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내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불만의 하나는 여러분들은 사람을 볼 줄 모른다는 것이지요.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사람 보는 눈이 완벽하게 상품미학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동성(同性)간에서는 즉 남자가 남자친구를 사귈 때나 또는 여자가 여자친구를 사귈 때에는 미모를 별로 고려하지 않습니다. 상호(相好)보다는 심호(心好)를 우위에 둡니다.
문제는 이성(異性)간에는 이것이 역전된다는 것이지요. 정물(靜物)이 아닌 사람의 경우 생각이 있고 행동이 있는 경우 상호(相好)보다는 신호(身好), 심호(心好) 훨씬 더 중요합니다.
당연히 사람을 볼 때에는 동성(同性)이건 이성(異性)이건 미모보다는 언행(言行)을 봐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언행의 바탕이 되는 사상(思想)을 봐야 합니다. 사상이 정감으로 뒷받침되어 있는 그런 수준의 완성도를 봐야 하는 것이지요.
내가 좋아하는 그리스 철학자의 경구가 있습니다. 셍 텍쥐베리의 글을 통하여 널리 알려졌지요.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심호(心好)는 상품미학이 지배하는 오늘의 감성적 환경에서 다시 한번 주목되어야 할 단어(單語)입니다.
나는 이 글에 다시 한 구절을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심호불여덕호(心好不如德好)’가 그것입니다. “마음 좋은 것이 덕(德)좋은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덕(德)의 의미는 논어의 이 구절에 나와 있는 그대로 입니다. ‘이웃’(隣)입니다. 이웃이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입니다.
심(心)이 개인으로서의 인간성과 품성이란 의미라면 덕(德)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에 무게를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이 좋으면 그 사람의 인간관계도 좋아지고 넓어지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심과 덕을 일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덕은 당연히 인간관계에 무게를 두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덕(德)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이 구절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사회복지학과 학생들이 잘 알겠지요. 최근에는 연복지(緣福祉)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복지문제를 국가와 개인 즉 사회와 개인의 문제로 인식하는 서구적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공동체라는 우리의 전통과 정서를 바탕으로 복지문제에 접근하자는 것이지요.
요컨대 50세까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 온 사람은 노후가 보장된다는 것이지요. 국가나 사회복지기관이 보살피지 않더라도 그때까지 그가 맺어온 인간관계가 안전망(安全網)이 되어 그의 노후를 책임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삶의 시스템 자체를 인간적인 것, 즉 덕성스러운 것으로 영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말하자면 복지문제를 삶의 문제 속으로 포용해나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령공편(衛靈公篇)에 ‘군자모도불모식(君子謀道不謀食)’ 그리고 ‘군자우도불우빈(君子憂道不憂貧)’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군자는 도(道)를 구하고 걱정하는 법이며 식(食)을 구하거나 빈(貧)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와 통하는 것이지요.
변혁기의 수많은 실천가들이 한결같이 경구(驚句)로 삼았던 금언(金言)이 있습니다.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는 것이었어요.
운동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중과의 접촉 국면을 확대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민주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 그리고 주민과의 정치목적에 대한 합의를 모든 실천의 바탕으로 삼는 것.
이러한 것들이 모두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의 원리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관계로서의 덕(德)이 사업수행에 뛰어난 방법론으로서 검증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이며 가치이기 때문에 귀중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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