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여담입니다만 지금은 정년 퇴임하셨지만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보안과장으로 계셨던 분이 계십니다. 몇 년 전입니다만 영등포 교도소 소장으로 근무하실 때 내가 전화를 받고 교도소로 방문하여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셨지만 나로서도 잊을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아마 내가 만난 보안과장 중에서 가장 무서운 소위 ‘악명 높은’ 보안과장이었습니다. 교도소의 규칙을 위반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은 예외가 없었지요. 본인도 그것을 근무원칙으로 공공연히 밝히고 계신 분이었어요.
그 분의 지론은 법이 약하면 약한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었어요. 교도소 규칙이 느슨하면 ‘열외통뼈’들이 약한 재소자들을 착취하고 구타하고 못살게 군다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그 과장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소위 열외통뼈들이었지요.
약한 사람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좋아하였습니다. 법가적 정치는 이처럼 기본적 시스템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잠재력을 키우고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기에는 법가적 대응은 부족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이 총체적 난국에 처해 있을 경우 즉 인간관계 자체가 유린되고 황폐화되어 있는 국면에서는 최소한의 시스템을 수립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법가적 대응과 유가적 대응을 법치와 덕치라는 논리로 단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위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만 소위 부끄러움(恥)에 관한 부분입니다.
덕(德)으로써 이끌고 예(禮)로써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되지만 정형(政刑)으로 다스리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이며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교통순경이 교통법규 위반차량 네다섯 대 중에서 한 두 대만 딱지를 끊자 적발된 차량운전자가 당연히 항의를 하였지요. 저 애도 위반차량이라는 것이지요. 교통순경의 답변이 압권이지요. “어부가 바닷고기 다 잡을 수 있나요?”
사카구치(坂口安吾)의 ‘타락론(墮落論)’에 의하면 사회적 위기의 지표로서 ‘집단적 타락의 증후군’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집단적 타락의 증후군도 여러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만 우선 이 교통위반 사례와 같이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상태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적발된 사람만 재수 없는 사람이 되는 그러한 사회입니다. 또 한가지는 유명인의 부정(不正)이나 추락(墜落)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부정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거나 추락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기보다는 한마디로 ‘쌤통’이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不正)과 추락에 대하여, 그것도 사회의 유명인의 그것에 대하여 오히려 쾌감 느끼는 단계가 되면 한 마디로 구제불능인 사회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부정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움은 어디서 오는가? 인간관계의 지속성(持續性)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나중에 다시 논의하겠습니다.
어쨌든 위정편의 이 구절은 정치와 인간관계에 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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