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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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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50>

제6강 논어(論語)-9

20세기를 보내면서 20세기를 돌이켜보는 프로그램을 제작한 적이 있습니다. ‘KBS 일요스페셜’이었습니다. 20세기를 끝내면서 비슷한 프로그램이 여러 방송국에서 제작되었습니다. NHK는 20세기를 ‘욕망(慾望)은 질투(嫉妬)한다’는 타이틀로 만들었고 BBC에서는 ‘희망과 절망’이란 주제로 정리하였다고 합니다.

KBS가 제작한 일요스페셜의 오프닝 멘트 중에 바로 이 ‘무왕불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란 없다’는 멘트가 그것입니다. 20세기를 허공을 향한 질주(疾走)로 규정하고 그러한 질주가 21세기에도 다시 반복되리라는 절망을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20세기의 오만과 패권주의가 버젓이 반복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지금이 과연 21세기인가를 회의하고 있는 것이지요. 요컨대 과거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편의를 위한 관념적 개념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구절을 무엇보다 먼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는 화두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과거와 현재의 내부을 구성하고 있는 실체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변화시켜냄으로써 즉 온고(溫故)함으로써 새로운 미래(新)를 지향(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을 보다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은 많은 경우 온고(溫故)쪽에 무게를 두어 옛것을 강조하는 전거(典據)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전통을 강조하거나 나아가서 복고적 주장의 근거로 원용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온고(溫故)보다는 지신(知新)에 무게를 두어 고(故)를 딛고 신(新)으로 나아갈 것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온(溫)의 의미가 단지 옛 것을 복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단절하는 것이 온(溫)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위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고(故)와 신(新)이 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옛 것 속에는 새로운 것을 위한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변화를 가로막는 완고한 장애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신(知新)의 방법으로서의 온(溫)이란 생환(生還)과 척결(剔抉)이라고 하는 두 가지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는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문법적으로는 ‘스승이란 해볼만한 것이다’라고 해석에도 물론 무리가 없습니다.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더구나 과거지사(過去之事)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창조자이어야 합니다.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라야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스승이 이러한 창조자이며 나아가 비판적 지성이라면 물론 해볼만한 것이라는 해석이 자연히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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