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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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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49>

제6강 논어(論語)-8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爲政)

溫(온) : 따뜻이 데우다. 익히다. 깊이 탐구하다. 캐어 들어가다.
故(고) : 이전에 배운 것. 옛 것.
知新(지신) : 새로운 것을 알다.
溫故知新 : 이전에 배운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알다. 또는 故 이외의 새로운 것을 알다.
可以爲師矣(가이위사의) : 스승이 될 수 있다. 또는 스승이란 해 볼만하다.

이 구절은 널리 사용되고 있는 구절입니다. ‘옛 것을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을 다시 읽어보자는 까닭은 먼저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과거란 흘러 가버린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리고 과거는 망각의 시작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허약하고 잘못된 것이지요. 다음 글은 ‘강물과 시간’이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흔히 시간이란 유수(流水)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유수처럼 흘러가는, 그야말로 물과 같다는 생각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로 시간을 객관적 실재(實在)로 인식한다는 점이 그렇다. 시간이란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존재형식일 따름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기의 나이를 2백살, 3백살이라고 대답한다. 나무가 변하지 않고 사막이 변하지 않고 하늘마저 변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대지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나이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당연한 것이다. 해가 뜨고 지는 것마저도 변화가 아니라 반복이다. 아프리카의 오지에 1년을 3백65개의 숫자로 나눈 캘린더는 없다.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걸치는 옷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간은 미래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미래로부터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은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매우 비현실적이고도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미래에서 자란 나무를 현재의 땅에 이식(移植)하려는 생각만큼이나 도착된 것이다. 시간을 굳이 흘러가는 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물질적 실재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정작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은 반대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기는 실재의 변화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새 천년 담론의 와중에서 나는 시간의 실재성과 방향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현재 나타나고 있는 몇 가지 오류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대부분의 새 천년 담론이 이끌어내는 결론이 그렇다. 새 천년 담론은 다가오는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결론으로 이끌어 낸다. 이러한 미래담론의 기본구도는 2가지 점에서 오류를 낳는다.

첫째 미래의 어떤 실체가 현재를 향하여 다가오는 구도이다. 그리고 둘째 그 미래는 현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야말로 새로운 것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도착된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 시간에 대한 도착된 관념은 결국 사회변화에 대한 도착된 의식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질의 존재형식인 시간이 실체로 등장하고, 그 실체는 현재와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며, 그것도 미래로부터 다가온다는 사실은 참으로 엄청난 허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허구가 밀레니엄 담론을 지배하는 기본 틀이 되고 있다. 밀레니엄 담론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의 변화 읽기와 변화에 대한 대응방식의 기본 틀이 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글은 주로 ‘미래’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 초점을 맞춘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경우도 같은 논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단절된 형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관념은 사유(思惟)의 차원에서 재구성(再構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와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일 뿐입니다.

우리가 논어의 이 구절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통일적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주역 지천태(地天泰) 괘의 효사(爻辭)에 무왕불복(無往不復)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주역 편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지나간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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