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奇)황후의 조카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는 원나라가 망한 뒤 요동의 동녕부(東寧府)를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공민왕 18년(1369)에 고려는 그 정벌에 나섰습니다. 이성계는 동북면 원수, 지용수 양백연(楊伯淵)은 서북면 원수를 맡았습니다.
이듬해 1월에 이성계는 기병 5천 명과 보병 1만 명을 이끌고 동북면에서 황초령(黃草嶺) 설한령(雪寒嶺)을 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이날 저녁 서울의 서북쪽 하늘에 보랏빛 기운이 가득 차고 그림자가 모두 남쪽으로 뻗쳤는데, 천문을 맡은 서운관(書雲觀)에서 용맹한 장수의 기운이라고 말하자 임금이 기뻐하며 이성계를 지목했다고 합니다.
이성계는 우라산성(亏羅山城)을 포위하고 장기인 활솜씨를 발휘했습니다. 70여 발을 쏘아 모두 적의 얼굴을 바로 맞추니 성 안에서는 기운이 쑥 빠져버렸습니다. 지휘자는 밤중에 도망치고 이튿날 두목 20여 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 항복했습니다.
다른 산성들은 소문만 듣고 모두 항복해 총 1만여 호를 얻었습니다. 노획한 소 2천여 마리와 말 수백 필을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쪽 사람들이 매우 기뻐하고 귀순하는 사람이 저자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성계는 원나라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 배주(拜住)와 동녕부 동지사 이원경(李原景) 등 3백여 호를 데리고 와서 임금에게 바쳤습니다. 이원경은 조상이 본디 고려 사람이라며 항복을 해왔고, 원나라 장원 급제 출신의 배주도 이성계를 통해 항복해 임금으로부터 한복(韓復)이란 성과 이름을 받았습니다. 한복은 이성계를 매우 정성껏 섬겼습니다.
8월에 동녕부 공격령이 내려졌습니다. 12월에 이성계는 친병 1천6백 명을 이끌고 의주(義州)에 이르러 부교(浮橋)를 만들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빠른 기병 3천 명으로 요성(遼城)을 습격해 함락시켰으나 기새인첩목아는 도망쳤습니다. 이 싸움에서도 이성계는 적장 처명(處明)을 활솜씨로 항복시켜 부하로 삼았습니다.
이때 중국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성을 공격하면 꼭 빼앗는 나라로 고려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다.”
공민왕 20년(1371) 7월에 이성계는 문하부 지사가 되고 이색(李穡)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는데, 임금이 측근 신하에게 물었습니다.
“문신인 이색과 무신인 이성계가 같은 날 문하부에 들어왔는데, 조정에서는 어떻게들 생각하는가?”
이는 스스로 인재를 제대로 등용했다고 자랑스러워 한 말이라고 합니다.
북방의 사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이제 문제는 왜구였습니다. 공민왕 21년(1372) 6월에 왜적이 동북면 지역을 노략질하자 임금은 이성계를 화령부(和寧府, 영흥) 윤(尹)으로 삼고 그대로 대장으로 삼아 왜적을 막게 했습니다.
우왕(禑王) 원년(1375) 9월에 왜적의 배가 덕적도(德積島) 자연도(紫燕島) 두 섬으로 잔뜩 모이자 우왕은 여러 도(道) 군사를 징발해 이성계와 삼사(三司) 판사 최영에게 거느리도록 하고 동강(東江) 서강에 군대를 모아 적을 막도록 했습니다.
우왕 3년(1377) 3월에 왜적이 강화부(江華府)를 노략질해 도성이 크게 흔들리자 임금은 이성계와 의창군(義昌君) 황상 등 열한 명의 대장을 시켜 서강에 군대를 모아 겁을 주게 했습니다.
이해 5월에 왜적이 경상도에 쳐들어왔습니다. 경상도 원수 우인열(禹仁烈)은 왜적이 대마도(對馬島)에서 새까맣게 몰려온다며 도와서 싸울 장수를 보내달라고 청했습니다. 이성계를 보내기로 했는데, 그가 도착하지 않자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움에 떨었으며 우인열은 연신 보고를 올렸습니다.
이성계는 밤낮으로 행군해 적군과 지리산(智異山) 밑에서 싸웠습니다. 2백여 보 거리에서 적 하나가 몸을 숙이고 손으로 궁둥이를 두드리며 두렵지 않다는 듯이 욕을 해댔습니다. 이성계가 화살 한 개로 거꾸러뜨리니 적군이 놀라고 사기가 꺾여 크게 무너졌습니다.
낭패한 적은 산으로 올라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위에서 칼과 창을 고슴도치 털처럼 드리우고 있어 우리 군사가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이성계는 휘하 장수를 보내 치게 했으나 바위가 높고 가팔라 말이 올라갈 수가 없다며 돌아왔습니다.
이성계가 꾸짖고 다시 둘째아들 이방과(李芳果)―나중의 정종(定宗)―를 보냈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성계는 직접 가서 보겠다고 말하고 휘하 군사들에게 따라오라고 일렀습니다. 이성계의 말이 한 번에 뛰어서 오르니, 군사들이 밀고 당기며 따르고 분발해 적군을 쳤습니다. 적군은 태반이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었으며 나머지 적군도 쳐서 모두 섬멸했습니다.
8월에는 왜적이 서해도(西海道, 황해도) 일대를 노략질했습니다. 장수들이 거푸 패해 이성계 등이 싸움을 도울 장수로 동원됐습니다. 이성계는 싸움에 나가기 전에 투구를 백수십 보 밖에 놓고 쏘아 싸움 결과를 점쳐보았는데, 세 번 쏘아 모두 꿰뚫었습니다.
해주의 동쪽 정자(亭子)에서 싸우는데, 싸움이 한창일 때 깊이가 한 발을 넘는 진창 땅을 만났습니다. 이성계의 말은 한 번 뛰어서 건너갔으나 따라간 사람은 모두 건너지 못했습니다.
이성계는 가지고 있던 화살 20 개 가운데 17 발을 쏘아 모두 맞혔고, 군사를 풀어 승세를 타고 마침내 적군을 크게 부수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성계는 17 발 모두 왼쪽 눈초리를 쏘았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서 살펴보니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남은 적군들은 험한 곳에 의지해 섶을 쌓고 튼튼히 지켰습니다. 이성계는 섶에 불을 지르도록 명령하고 걸상에 걸터앉아 술을 마셨습니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 차고 적군은 곤경에 빠지자 죽을 힘을 내어 부딪쳐왔습니다. 화살이 자리 앞의 술병에 맞는데도 이성계는 태연히 앉은 채 싸움을 지휘했다고 합니다.
이때 왜적들은 우리 나라 사람을 사로잡으면 꼭 이성계가 지금 어디 있는가를 묻고 감히 이성계의 군사에게는 가까이 오지 못했으며, 틈이 보여야만 들어와 노략질했다고 합니다.
우왕 4년(1378) 4월, 왜적의 배가 서해로 몰려들어 해풍(海豐, 개풍)을 거쳐 개성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큰소리치니, 온 나라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대궐 문에 군사를 배치했고, 성 안이 흉흉했습니다. 지역 군사로 하여금 성에 올라 망보게 하고, 여러 부대를 동강과 서강에 나가 지키도록 했습니다.
삼사 판사 최영이 여러 부대를 통솔해 해풍군에 진을 쳤습니다. 적군이 이를 정탐해 알고 최영의 군대만 부수면 서울을 엿볼 수 있다며, 도중의 진지는 건드리지 않고 곧장 해풍으로 달려와 중군(中軍)으로 향했습니다.
최영은 사직의 존망이 이 한 싸움에 달렸다며 부장 양백연과 함께 나아가 적을 쳤습니다. 최영은 적군이 쫓아오자 이성계의 정예 기병이 있는 곳으로 달아났고, 이성계는 양백연과 합세해 적군을 크게 쳐부수었습니다. 최영도 옆에서 쳐 적군은 거의 다 죽었고 나머지 무리는 밤에 도망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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