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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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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4>

화살을 쏘는 대로 맞히다

자, 이제 드디어 이성계의 차례입니다.
이성계는 1335년 함흥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이자춘이 최한기(崔閑奇)라는 사람의 딸에게 장가들어 낳았죠.

여기서 흥미로운 것이 이원계(李元桂)라는 배다른 형의 존재입니다. 실록은 이원계가 서자라고 했지만, 이를 그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이성계의 어머니 최씨가 후처고 이원계는 전처가 낳은 적장자(嫡長子)인데, 이성계가 임금이 되자 이성계를 적통으로 만들기 위해 전처를 첩으로 둔갑시켜버렸다는 것이죠.

<표:이성계 가계도>

일리가 있습니다. 나중에 이성계는 임금이 된 뒤 이원계의 큰 아들 이양우(李良祐)를 자기 아들들과 동격인 군(君)으로 봉합니다. 적자인 형의 아들이라도 한 등급 낮추는 게 당연할 텐데, 서출을 왕자와 같은 자리에 올린 것은 좀 이상하지요? 그렇다고 뚜렷한 공로가 있었던 것도 아니구요. 보상심리 아닐까요?

또 태종 때 환조(이자춘)의 비문(碑文)에 적.서의 ‘사실’이 잘못 적혀 있다 해서 소동이 나는데, 그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으로 봐서도 ‘혐의’가 짙습니다. 신하들은 이원계의 자손이 서출인데 비문에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고 난리를 치지만, 정작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은 그쪽 눈치를 보며 어물어물하는 것이죠. 엄연히 왕비로 책봉받은 이성계의 후처 강(康)씨 소생들을 서자로 모는 행태로 미루어 봐서도 이원계가 서자라는 얘기는 미심쩍습니다.

이성계의 사촌(이자춘의 형의 아들) 이름이 이천계죠? 이들 사촌의 돌림자가 ‘계’자 아닐까요? 이자춘의 서자 하나는 돌림자를 따라 이원계로 짓고 또 다른 서자는 이화(李和)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작명을 했다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이성계는 어려서부터 잘 생기고 똑똑하고 용감해 3박자를 고루 갖춘, 한마디로 애초부터 임금 감이었다는 게 실록의 주장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사진:태조 이성계>

다만 그가 활을 매우 잘 쏘았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지요. 이성계에 관한 실록의 초기 기사는 온통 활 잘 쏜 얘기뿐이니까요. 이런 식입니다.

이성계가 젊었을 때 이자춘의 첩 김씨(이화의 어머니)가 담장에 앉은 까마귀를 쏘아보라고 했습니다. 다섯 마리를 단발에 떨어뜨렸죠. 김씨는 남이 알면 큰일나겠다 싶어 이 일을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했답니다.

냇가에서 목욕하고 쉬다가 숲에서 잇달아 달려나오는 담비 스무 마리를 나오는 족족 맞추기도 했습니다. 또 노루 다섯 마리 한 무리를 쫓아 다섯 발로 모두 죽인 적이 있었으며, 평상시에도 노루 서너 마리를 연달아 쏘아 죽인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숨어 있는 꿩을 잡을 때는 꼭 놀라게 해서 몇 길 위로 날게 한 다음에 올려 쏘아 번번이 맞혔습니다.

동북면(함경도) 도순문사(都巡問使, 도지사) 이달충(李達衷)이라는 사람이 고을을 순시할 때였습니다. 그 부하 장수 하나가 이성계와 다투고 이달충에게 와 일러바쳤습니다.

그런데 이성계를 부른 이달충은 그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뜰에 내려가 맞아들인 뒤 술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부하는 당연히 불만을 제기했겠지만, 이달충은 부하에게 절대로 그에게 맞서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습니다. ‘큰 인물’임을 알아본 것이지요.

이달충이 서울로 돌아갈 때는 더욱 기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자춘이 전별하면서 술을 따르자 이달충은 서서 마셨는데, 이성계가 따르자 꿇어앉아 마셨습니다. 그러고는 이자춘에게 말했습니다.

“아드님은 참으로 비범한 사람이오. 공께서도 아마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공의 집안을 번창하게 할 사람은 틀림없이 이 아드님일 것이오.”

그러고는 이성계에게 자기 자손을 부탁했습니다. 이달충의 아들 이전(李專)은 나중에 이성계가 임금이 된 뒤 술에 취해 실언을 해서 죽게 됐으나, 이런 인연으로 죽음을 면하고 해남현(海南縣)으로 도형(徒刑)을 가는 선에서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도형중에 죽기는 했지만.

이성계가 즐겨 쏜 것은 대초명적(大哨鳴鏑)이라는 화살이었답니다. 싸리나무로 살대를 만들고 학의 날개로 깃을 달아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습니다. 순록의 뿔로 깍지를 만들어 크기가 배(梨)만 했습니다. 살촉은 무겁고 살대는 길어 보통 화살보다 힘이 배는 세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이자춘이 이성계의 화살을 뽑아 보고 사람이 쓸 게 못 된다며 땅바닥에 던져버렸는데, 이성계가 주워 살통에 꽂고 섰다가 달려나오는 노루 일곱 마리를 잇달아 쏘아 죽이니 이자춘도 기뻐하며 웃었다고 합니다. 또 평소에 배만한 나무 공을 만들고 사람을 시켜 50~60 보 밖에서 위로 던지게 하고는 나무살로 쏘아 번번이 맞혔습니다.

사냥을 자주 다닌 이성계는 위급한 상황도 곧잘 넘겼다고 합니다. 한번은 말을 달려 멧돼지를 쫓다가 갑자기 백 길 낭떠러지가 나타나자 얼른 말에서 몸을 빼쳤습니다. 멧돼지와 말은 모두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졌고 자신만 살아났습니다. 큰 범을 사냥하다가 범이 갑자기 곁에 나타나 물려 하자 팔을 휘둘러 벌렁 나자빠지게 한 뒤 활로 쏘아 죽인 일도 있습니다.

그에게는 얼음판 위를 달리는 것도 예사였습니다. 앞서의 이달충 전별연 때는 얼음이 언 큰 연못으로 도망치는 노루를, 말을 타고 쫓아 건너가서 쏘아 죽였습니다. 이자춘을 따라 사냥을 갔을 때도 짐승을 발견하고 얼어붙은 비탈길에 말을 달려 모두 맞히니, 야인(野人)들도 놀라 세상에 당해낼 사람이 없겠다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또 들에서 사냥하면서 큰 표범이 갈대 속에 엎드렸다가 갑자기 뛰어나와 달려들어 형세가 급박했습니다. 말고삐를 돌릴 틈도 없이 말을 채찍질해 도망쳤는데, 깊은 못은 얼음이 겨우 얼기 시작해 사람조차 건너갈 수 없는 상태였지만 이성계는 그 위로 말을 달렸어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말 발자국에 구멍이 나 물이 튀어올랐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동북면 화령(和寧)에서 사냥하는데, 땅이 험하고 미끄러웠지만 이성계는 가파른 비탈을 말을 달려 내려와서 큰 곰 몇 마리를 모두 화살 한 개로 죽였습니다. 요성(遼城) 싸움에서 항복해 따라다니던 처명(處明)이라는 장수가 감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많은 사람을 겪어보았지만, 공의 재주는 천하 제일입니다.”

홍원에서 사냥을 하는데, 노루 세 마리가 떼를 지어 나왔습니다. 이성계가 말을 달려 먼저 한 마리를 쏘아 죽이자 두 마리가 달아났습니다. 다시 쏘아 화살 한 개가 두 마리를 꿰뚫고 나무에 꽂히니, 부하를 시켜 그 화살을 뽑아 오게 했습니다. 부하가 늦게 오자 까닭을 물었습니다. 부하는 화살이 나무에 깊이 꽂혀 잘 빠지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성계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노루가 세 마리였더라도 내 화살 힘으로 충분히 꿰뚫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성계가 한번은 친한 친구 여럿을 모아 술을 준비하고 과녁에 활을 쏘았습니다. 배나무가 1백 보 밖에 있고, 나무 위에는 열매 수십 개가 서로 포개어 늘어져 있었습니다. 손님들이 이성계에게 쏘아보라고 조르니, 한 발로 모두 떨어뜨려 손님을 접대했습니다. 손님들이 탄복하면서 술잔을 들어 서로 하례했습니다.

이성계가 이두란(李豆蘭)과 함께 사슴 한 마리를 쫓았습니다. 갑자기 쓰러진 나무가 앞에 가로막혀 있고 사슴은 나무 밑으로 빠져 달아났습니다. 이두란은 말고삐를 잡아 돌아갔지만, 이성계는 나무 위로 뛰어올라 이를 넘은 뒤 나무 밑으로 빠져나간 말을 다시 잡아타고 뒤쫓아가 사슴을 잡았습니다. 이두란이 놀라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공은 하늘이 낸 재주여서 사람의 힘으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공민왕(恭愍王)이 신하들로 하여금 과녁에 활을 쏘게 하고 직접 구경했습니다. 이성계가 백 번 쏘아 백 번 다 맞히니, 임금이 감탄해 말했습니다. “오늘 활쏘기는 이성계의 독무대로구나.”

원나라에 벼슬했던 찬성사 황상(黃裳)은 활 잘 쏘기로 세상에 이름이 나, 원나라 황제가 직접 그 팔을 당겨 살펴보기까지 했습니다. 이성계가 동료들을 모아 덕암(德巖)에서 과녁에 활을 쏘는데, 과녁을 1백50 보 밖에 설치했는데도 이성계는 쏠 때마다 다 맞혔습니다.

한낮이 지나 황상이 오자, 재상들이 이성계에게 황상과 단둘이 활쏘기 시합을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50 발까지는 둘 다 실수 한 번 없이 맞혀 팽팽했으나, 그 뒤에 차이가 벌어졌습니다. 황상은 간혹 맞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성계는 수백 발을 쏘았어도 빗나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 한번은 대궐의 작은 은거울 10 개를 내다가 80 보 밖에 두고 신하들에게 쏘게 한 뒤 맞힌 사람에게 그 거울을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성계가 열 번 쏘아 열 번 다 맞히니, 임금이 칭찬하며 감탄했습니다.

이쯤에서 실록은 이성계의 활솜씨에 덧붙여 인품까지 치켜세웁니다. 이성계는 과녁에 활을 쏠 때마다 상대의 잘하고 못함과 맞힌 살의 수를 살펴 겨우 상대와 서로 비등하게 할 뿐 승부를 내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아무리 구경하자고 권해도 한 개쯤 더 맞힐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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