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조선왕조실록을 국보 1호 감이라고 했습니다. 남대문이 국보 1호라는 것은 물론 단순히 지정 순서를 표시하는 데 불과합니다. 그러나 선생의 이 말은 적어도 ‘국보 1호’만큼은 우리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성을 지녀야 했던 것 아니냐는 아쉬움의 표현이면서, 그렇게 지정할 경우 조선왕조실록이 가장 적합하다는 주장일 것입니다.
남대문 정도의 옛 건축물이야 흔한 것이니 아예 대상 밖이고, 석굴암이나 팔만대장경, 고려청자 등 다른 가능성 있는 후보들보다도 조선왕조실록이 더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라는 것이지요.
국제적으로도 유네스코에서 선정하는 세계 기록유산으로 일찌감치 올랐으니, 그 가치는 우리나 남이나 모두 인정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남에게까지 내놓고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혹시 읽어보신 분 계십니까? 아마 극소수 전공자들 외엔 없을걸요. 그리고 전공하신 분들도 부분적으로만 보신 분들이 많을 거구요.
어려운 책 아니냐구요? 천만에요. 재미있는 얘기라면 ‘야사(野史)’를 떠올리시겠지만, ‘정사(正史)’라 할 수 있는 실록에도 흥미진진한 얘기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조선 시대를 다룬 역사 이야기들의 ‘원본’은 바로 실록이거든요.
번역본도 나와 있습니다. 4백권이 넘는 완역본이지요. 그러나 오히려 그게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엄청난 분량을 읽어볼 엄두가 나겠습니까? 1주일에 한 권씩 꼬박꼬박 읽어도 1년이면 50권, 그러니까 8년 걸려야 다 읽겠군요. 말이 그렇지 1주일에 한 권씩 읽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 실제로는… 계산이 안 나오는 셈이지요.
또 한가지 문제점은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운 번역이라는 점입니다. 번역 문장이나 번역어 선택 등이 전문가들이나 겨우 알아볼 정도인데다, 체재 자체가 매일매일의 기사를 줄줄이 엮어 놓아 ‘시간순’이라는 점 외엔 아무런 정리도 돼 있지 않은 ‘자료 더미’이기 때문에 읽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뭐 그렇게 다 읽을 필요 있느냐구요? 다이제스트판요? ‘한 권으로’ 읽는다는 그 책 말씀이신가 본데, 남의 책 얘기 해서 좀 뭣하지만 그 책은 이름만 빌린 것이지 조선왕조실록의 번역본이라기보다 별도의 ‘저작’으로 보아집니다. 설사 다이제스트라 해도 400 대 1의 다이제스트, 책 한 권을 한두 페이지에 정리하는 다이제스트가 가능할까요?
그것말고도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얘기 한 귀퉁이씩을 가지고 만든 책들은 많습니다. 아니 어쩌면 조선 시대를 다룬 이른바 ‘역사교양서’라는 것들은 상당수가 조선왕조실록을 ‘짜깁기’한 것들일 겁니다.
이 짜깁기 책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조선왕조실록을 간접 대면하기는 합니다만, 이런 책들에는 우리가 조심해야 할 독소가 있습니다. 그 저자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저자의 생각과 필요에 따라 왜곡이나 편향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결국 역사를 그 저자가 일러주는 방식으로밖에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2차 저작물보다는 원전을 그대로 읽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왜곡 가능성을 차단하니까요.
어쩌다가 필자는 이 문제에 뛰어들게 됐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재구성하고 다시 번역해 펴내는 작업입니다. 실록 전체의 기사를 몇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고 기사 배열을 다시 하는 재편집 작업을 통해 실록이 ‘자료 더미’가 아닌 ‘책’의 꼴을 갖추도록 하고, 번역도 일반인들이 좀더 이해하기 쉬운 방식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재편집 조선왕조실록’(청간미디어 출판)이라는 이름 아래 ‘태조정종본기’와 ‘태종본기 1~3’ 등 이제 4권을 냈으니, 겨우 시작인 셈이죠.
그런데 그 일을 하면서 또 하나의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 일은―비록 재편집으로 원문의 체재는 바꾸지만―번역이기 때문에 당시 사관과 편집자들의 육성을 그대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그 육성을 그대로 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지만, 독자층은 아무래도 이쪽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 한정됩니다.
조금 더 넓은 독자층을 생각하면 또 다른 방식의 조선왕조실록도 필요합니다. 이 연재가 바로 그것입니다. 앞의 작업도 ‘실록의 대중화’로 이름붙였지만, 이 작업은 좀더 동심원이 넓은 대중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연재는 조선왕조실록을 직접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필자의 문장으로 재정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 식으로 풀어나갈 겁니다. 이 연재를 읽어나가면 내용상으로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얘기들은 거의 훑는 셈이지요.
다만 앞서 말한 원전과 2차 저작물 개념을 빌린다면, 이것은 1.5차 저작물쯤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필자에 의한 왜곡 가능성이 조금은 남아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피하려면 역시 원전을 봐야겠지요. 물론 필자도 그런 왜곡을 피하려고 최대한 애쓰겠고 이를 위해 실록의 내용을 충실히 전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겠지만,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것 아닙니까? 완벽하게 피해나갈 수만은 없을 겁니다.
또 하나, 원전의 한계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실록이 다른 옛날 책들에 비해서는 객관성 측면에서 훨씬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체제의 산물이지만, 예나 이제나 모든 책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요. 실록의 경우는 편찬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후대의 개수(改修) 과정에 편향성을 가늠할 수 있는 힌트가 있습니다.
물론 필자의 문장으로 서술된다는 점이 이때는 장점으로 변해 필자가 어느 정도 설명을 붙이겠지만, 100% 걸러낼 수는 없는 것이니만큼 그런 편향성에 대한 의심의 눈길은 이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 할 겁니다.
자, 이제 떠나십시다. 5백년 조선 왕조 시대로의 여행은 고려 말 이성계의 조상 얘기로부터 시작합니다.
*필자는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공부하고 KBS와 중앙일보 기자, 범우사 편집장을 지냈다. 국보 1호감이라는 '조선왕조실록'이 일반으로부터 크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왕조실록을 위해 방송-신문-출판 등 3대 미디어 영역에서의 경험을 모아 재미있게 읽히는 조선왕조실록을 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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