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사(楚辭)’는 ‘시경(詩經)’과 함께 읽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만 시대적으로는 ‘서경(書經)’ 다음에 읽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초사는 한(漢)나라 유향(劉向.BC 77-6)이 굴원(屈原) 송옥(宋玉) 등의 작품을 모아 펴낸 책명을 말합니다. 이 책이 나온 이후로는 일반적으로 초(楚)나라의 시체(詩體)를 가리키는 것으로 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초사는 망실되고 현재 전하는 것은 왕일(王逸)의 ‘초사장구(楚辭章句)’ 총 17편입니다.
시경(詩經)이 북방 중원의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한 4언체(四言體) 운문(韻文)인데 비하여 초사는 이러한 북방 4언체를 혁신한 양자강 유역에서 발전한 남방문학입니다. 남방국가인 초(楚)나라의 시체로서 음악에 가까운 운문입니다.
특히 방언(方言) 무풍(巫風) 풍습(風習) 음운(音韻) 등 초나라의 뛰어난 문물과 풍부한 민요 특히 무풍(巫風)의 토양 위에 난숙하게 발전한 낭만문학(浪漫文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경이 사실적이고 노동과 삶과 보행의 정서로 이루어진 시세계(詩世界)임에 비하여 초사의 세계는 자유분방, 정열, 상상력, 신비, 환상 등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노래입니다. 초사는 중국문학사에 있어서 시는 물론 산문 소설 희곡에 이르기까지 중국문학 전반에 광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시경이 집단창작과 전승을 통하여 만들어졌음에 비하여 초사에서는 작자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굴원이 중국시인의 대표인 것도 작자가 초사에서 비로소 그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굴원의 ‘이소‘(離騷)가 초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힙니다. ‘이소‘는 흔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이소‘는 전쟁영웅의 대서사시가 아니라 장편 서정시라는 점에서 전혀 다른 시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테의 ‘신곡(神曲)‘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두 작품의 주인공이 하늘과 지옥을 여행한다는 점은 유사하지만 신곡에서는 그것이 인간이성의 구법(求法)여행임에 비하여 ‘이소‘에서는 그것이 실연한 여인의 구애(求愛)여행인 점이 판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소‘가 초사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3백74행이나 되는 너무 긴 시라서 여기서는 짧은 ’어부(漁父)‘ 한 편을 함께 읽기로 합니다.
漁 父(屈原)
屈原旣放 游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
漁父見而問之曰
子非三閭大夫歟 何故至於斯
屈原曰
擧世皆濁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
漁父曰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世人皆濁 何不淈其泥 而揚其波
衆人皆醉 何不餔其糟 而歠其釃
何故深思高擧 自見放
屈原曰
吾聞之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安能以身之察察 受 物之汶汶者乎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安能以皓皓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
漁父莞爾而笑 鼓枻而去
乃歌曰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遂去不復與言
三閭(삼려)-楚나라 왕실의 세 가문 昭, 屈, 景씨. Ꞧ滯(응체)-막히고 얽매이다.
與(여)-어울리다. 더불다. 糟(조)-지게미. 歠(철)-마시다.
釃(리)-묽은 술. 그를 시. 高擧(고거)-高踏, 孤高함.
察察(찰찰)-결백한 모양. 깨끗한 모양. 汶汶(문문)-불결한 모양.
莞爾(완이)-빙그레 웃는 모습. 枻(예, 설)-노.
滄浪(창랑)-漢水의 하류. 차고 푸른 물. 纓(영)-갓끈
‘어부’는 굴원이 오랜 유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한 고뇌(苦惱)와 울분(鬱憤)을 토로한 애국적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는 시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시입니다. 고등학교 한문2교재에 있습니다. 중요한 부분만 그 뜻을 새겨보기로 하지요.
전체의 구조는 어부와 유배된 굴원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의 구성을 그렇게 가지고 간 것이고 굴원의 자문자답(自問自答)으로 보아도 상관없습니다.
먼저 어부가 유배되어 초췌한 몰골로 호숫가를 거닐고 있는 굴원에게 유배당한 이유를 질문합니다. 굴원이 밝힌 유배의 이유는 다소 엉뚱합니다.
세상사람들이 죄다 부패한데 자기 혼자만 깨끗하였기 때문에 추방당하였고, 세상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해 있는데 자기 혼자만 맑은 정신이어서 추방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굴원이 자신의 결백과 정치적 주장을 굽히지 않은 면모를 그대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굴원의 이름은 평(平)으로서 전국시대 말(BC 345-295(?)) 초(楚)나라 왕족의 후예로서 뛰어난 학식으로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26세에 나라의 정사를 주관하는 좌도(左徒)에 오릅니다.
당시 합종연횡(合從連橫)의 시대에 강국인 진(秦)나라와의 연합을 반대하는 반진(反秦)주의자로서 줄곧 제초(齊楚)동맹을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친진파(親秦派)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모함을 받게 되고 유배(流配)와 해배(解配)를 거듭하다가 결국 강남으로 추방됩니다.
어쨌든 추방당한 이유가 부패한 친진파의 참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천하가 부패하고 술에 취해 있는데 함께 어울리지 못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라는 주장은 일단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굴원의 이유에 대하여 어부는 그러한 굴원의 비타협적이고 고고한 처세에 대하여 비판합니다.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사(世事)의 변화와 추이(推移)에 능히 어울릴 수 있어야 함을 들어 굴원의 심사고거(深思高擧)를 나무랍니다.
여기에 대한 굴원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이 구절은 명구로 지금도 회자됩니다.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떨고 갓을 쓰는 법이며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떤 다음 옷을 입는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차라리 몸을 물에 던져 죽을지언정 깨끗한 몸을 더럽힐까보냐고 자신의 고고함을 선언합니다. 비타협적 기개를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러한 굴원의 비타협적 선언에 대하여 어부는 혼잣말처럼 노를 두드리며 노래하며 떠나갑니다.
이 노래가 이 시의 결론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어부가 읊조리는 노래로 되어 있습니다만 굴원이 스스로의 생각을 최종적으로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명구로서 암송되는 구절이지요.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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