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신영복 고전강독 <17>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신영복 고전강독 <17>

제3강 서경(書經)-3

여기서 주공에 대하여 좀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공은 공자(孔子)가 며칠 간 꿈에 보지 못해서 아쉬워하던 바로 그 사람이지요.

상(商)을 멸망시킨 무왕(武王)의 동생이 바로 주공(周公)인 희단(姬旦)이지요. 주공(周公)은 주은래(周恩來)와 함께 중국 최고의 정치가로 평가됩니다.

어느 왕조이건 창건의 역사는 파란 만장한 혁명사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주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주나라는 이를테면 신하의 나라가 쿠데타(逆取)에 의하여 역성혁명을 성공시켜 세운 국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백이 숙제(伯夷 叔齊)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것의 부당함을 간(諫)하다가 듣지 않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 죽었다는 고사가 바로 이 때의 일입니다.

초기의 권력관계가 매우 복잡하였어요. 무왕이 동생 주공을 노(魯)나라에 봉하였지만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않을 때여서 주공은 아들인 백금(伯禽)을 대신 임지로 보내고 자기는 남아서 계속 무왕을 보좌해야 하였습니다.

당시 72제후국 중 희(姬)씨가 55국으로 압도적으로 장악하였지만 여(呂)씨가 17국으로 만만치 않은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어요.

원래 주(周)나라는 서쪽에 있던 산간(山間)의 제후국(諸侯國)이었는데 남하(南下)하여 위수(渭水)평야로 이동하고 문왕(文王) 때에 태공망 여상(呂尙)을 얻어 강대해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곧 강족(姜族)과 주족(周族)의 연합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었어요.

17개 제후국을 장악한 여(呂)씨가 바로 여상(呂尙)의 강족(姜族)이지요. 여상은 문왕과 연합하여 그 세력을 확장하여 결국 무왕 때에 이르러 상(商)을 무너트린 것이지요.

이 여상이 곧 강태공(姜太公)입니다. 문왕을 만나기까지 곧은 낚시를 강물에 던져두고 세월을 낚고 있었다는 강태공이지요.

병법과 지략에 뛰어난 전략가로서 육도삼략(六韜三略)의 저자이며 무왕(武王)의 장인이기도 하지요. 강력한 정치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력을 변방인 산동성으로 거세시킨 것도 모두 주공의 정치적 수완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왕이 상(商)을 정벌한 후 상(商)의 마지막 임금 주(紂)의 아들 무경녹부(武庚祿父)를 후(候)에 책봉하여 상(商)나라 유민(遺民)을 그에게 복속시켰어요. 상(商)나라 유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왕(武王)은 그의 두 동생 관숙선(管叔鮮)과 채숙도(蔡叔度)를 무경(武庚)에게 사부(師父)로 붙였는데 무왕(武王)이 죽자 무경(武庚)과 두 동생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주공(周公)은 성왕(成王)의 명을 받들어 동생인 관숙선을 죽이고 채숙도를 추방합니다. 그리고 상(商)나라 유민을 모아 주(紂)의 형인 미자(微子)를 따르게 하고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丘縣) 부근인 송(宋)에 나라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미자(微子)는 송(宋)의 시조(始祖)가 됩니다. 송(宋)은 상(商)나라를 계승한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된 것이지요. 이 송(宋)나라와 인접한 나라가 공자(孔子)의 나라인 노(魯)나라이며 이 노(魯)가 바로 주공(周公)이 봉해진 제후국입니다.

주공은 조선시대의 세조와 같이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기가 군권(君權)을 장악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지만 끝까지 성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닦았습니다.

주공은 일반삼토(一飯三吐), 일목삼착(一沐三捉)이라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현인을 정성을 다하여 공손하게 모신 예화입니다.

한 끼 밥 먹는 동안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나가는가 하면 한 번 머리 감는 사이에도 세 번씩이나 젖은 머릿단을 움켜쥐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나갔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잠시 중국의 고대사에 대하여 몇 가지 언급해 두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중국고대의 제왕계보는 황제(黃帝)-전욱(顓頊)-제곡(帝嚳)-요(堯)-순(舜)-우(禹, 夏)-탕(湯,殷, 商)-문(文)-무(武)-주공(周公)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듣던 말이 바로 이 ‘요순우탕문무주공’이었거든요. 그러나 황제 이하 요(堯), 순(舜)까지는 가공의 인물로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반면에 하우(夏禹)는 실제 인물이라고 주장됩니다. 서경 우공(禹貢)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하(夏)의 건설지로 알려진 하남성 옌스시엔(偃師縣) 얼리터우(二里頭)와 그 주변지역에 있는 궁궐터, 분묘 등의 유물과 유적은 당시에 이미 권력과 계급의 존재를 증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염지(鹽地)유적은 그 곳이 경제적 중심지였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그리고 갑골문자(甲骨文字.가장 오래된 것 19대 盤庚 이후) 또는 복사(卜辭. 龜甲,獸骨에 새겨진 문자)의 존재라든가 우(禹)의 아들 계(啓)가 왕위를 세습함으로써 비로소 세습왕조가 시작되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일반적으로는 은대(殷(商)代)부터 실재한 왕조로 인정하는 것이 현재의 통설입니다.

BC. 1760년 경에 이 하(夏)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나라가 은(殷)입니다. 원래는 상(商)이었는데 주(周)가 상(商)을 정벌한 후에 수도의 이름을 따서 은(殷)나라로 낮추어 불렀지요

이 상(商)의 마지막 왕인 28대 주(紂)왕(帝辛)을 무(武)왕이 멸하고 주(周)를 세웠습니다. 이 때가 BC. 1100년 경이었습니다.

사마천(司馬天)은 사기(史記)에서 서(書)는 선왕(先王)의 사(事)를 기록한 것으로 정(政)에 장(長)하다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이야기했습니다. 한편 춘추(春秋)에 대해서는 시비(是非)를 변(辨)한 것이므로 치인(治人)에 장(長)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레닌은 ‘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역사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였지요.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