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에 대하여 몇 가지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동서양의 문명사적 비교에 관한 저술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의 차이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무엇과 무엇의 차이를 논하는 방식의 접근방법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각, 즉 비교하고 그 차이를 밝히는 관점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러한 관점은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물론 본질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한 경우보다는 그 형식에 있어서나 그 표현에 있어서의 차이가 지적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소위 차이라는 개념으로 그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경우는 그것이 갖고 있는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차이를 보려는 시각은 결국 표면에 국한된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차별화로 귀착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습니다.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존은 기본적으로 비슷한 것끼리 더 쉽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差異)보다는 관계(關係)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바로 그러한 관계망(關係網)을 주목하는 것이 바로 관계론적 패러다임입니다. 우리가 고전강독의 화두로 걸어놓은 것입니다.
서양문명은 동양문명에 대한 비교개념으로 만들어진 조어(造語)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류문명입니다. 현대세계를 주도하는 문화는 서양문화입니다.
서양문화는 그 자체가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문화적 준거(準據)입니다. 따라서 동양문화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주변적 위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서양적 시각에서 동양문화가 조명되는 구도이지요.
***종교와 과학의 모순**
근대사는 서구문명이 전세계로 확장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각국이 지난 몇 세기 이래 줄곧 서양문화를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서양문명을 이해한다는 것은 현대세계의 기본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문제점은 곧바로 현대세계의 구조적 문제와 연결된다고 믿습니다. 현대자본주의 나아가서는 현대의 세계질서를 서양문명의 근본적 구조 즉 문명적 패러다임의 문제로 이해하거나 개념화하는 것은 지나친 환원주의(還元主義)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전을 읽는 동기가 바로 현대적 과제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시각은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혁시기의 근본담론이 이 강의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서양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명제(合)라는 것입니다. 흅(D. Hume)과 칸트(I. Kant)의 견해입니다. 서양근대문명은 유럽고대의 과학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2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과학은 진리(眞理)를 추구하고 기독교신앙은 선(善)을 추구한다. 과학정신은 외부세계를 탐구하고 사회발전의 동력이 된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과 관계를 조정함으로써 그 기능이 잘 조화된 선진적 문화이었으며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한 저력임에 틀림이 없다. 이것이 서양문명의 구조입니다.
그러나 서양문명을 이루고 있는 이 2개의 축(軸)이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 결정적 문제라는 것이지요 과학은 반종교적이며 기독교신앙은 반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과학과 종교의 모순에 관한 역사적 사례는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계몽주의 이전에 기독교 교리를 벗어난 과학자들이 이단으로 박해를 받았지요. 여러분이 오히려 더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입니다.
루터는 코페르니쿠스를 천문학을 뒤엎으려하는 바보라고 비난하고 성경에 여호와가 태양을 멈추라고 명령했지 지구를 멈추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들어 지동설을 비판하였지요. 칼빈도 마찬기지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난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을 위협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자기의 이론을 감히 발표하지 못했으며 사후에 출판되었을 뿐입니다. 브루노는 지동설을 선전하다 불타죽었고 갈릴레이는 2차례 종교재판을 받고 그의 주장을 포기하고 법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한 말을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 외에도 과학과 종교의 모순과 박해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종교의 과학에 대한 억압이 아니지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문명 구도의 와해**
거듭되는 과학의 경이적 발전의 결과 오늘날에는 종교에 대한 과학의 압도적 우위로 말미암아 진리(眞理)와 선(善)이라는 2개의 축이 무너지고 그 조화와 균형의 구도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서양문명의 기본적 구도가 와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학이 도덕과 인생가치의 기초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규정력을 행사하면서 사회의 모든 질서를 획일적으로 지배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점을 일찍이 지적하여 많은 사람들이 서양의 황혼,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하였지요.
오늘날에는 더욱 현실적인 문제들의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하지요. 현대서양사회의 범죄율, 생명경시는 종교와 신앙의 상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과학이 자신의 대립면(對立面)을 상실하고 무한질주를 거듭하였다는 주장입니다.
핵, 세균, 화학무기, 기타 고분자화합물질의 대량생산과 배출로 인하여 생태계는 파괴되고 결과적으로 인류의 생존조건마저 파괴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과학은 희망을 주기보다는 공포를 주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기되는 성찰이 바로 서양문명의 패러다임 자체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양문명의 구조 자체의 불완전성 즉 과학과 종교의 이원적 구성과 모순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처방으로 제기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을 회복하여 과학이성에 대한 종교의 지도성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는가 하면 종교의 지도성 회복은 불가능하며 현대서양의 몰락은 불가피하다는 예언까지 등장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패권국가의 일방주의적 세계경영은 또 다른 형태의 몰락이라고 주장되기도 하지요.
***인문주의로 바라보자**
이러한 반성과 성찰의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동양학적 패러다임이었습니다. 서양근대문명의 모순이 바로 과학과 용납될 수 없는 종교에 철학적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반성과 함께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 인문주의(人文主義)에 두었더라면 이러한 모순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등장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동양학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은 없으며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현실론이 그 토대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다시 살펴 보겠지만 자연과 인간과 나아가서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고전강독에서 확인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최근 동양학에 대한 서구의 관심은 이와 같은 문명론적 동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양학의 기본구도가 인문주의인 것은 사실이며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는 구조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동양학에 대한 관심은 종래의 운동관성이 그대로 연장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대륙에 이어서 다시 떠오르는 광범한 중국시장과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일본자본에 대한 국제금융자본의 관심이 오히려 주된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자본의 동양에 대한 관심은 어쨌든 구미 중심의 세계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모순의 실체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세계화라는 형식을 띤 패권주의적 팽창정책 역시 바로 근대 서양문명의 기본적 모순구조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자본주의 역시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 군사과학이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압도적 군사력을 배경으로 동구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소연방의 해체와 러시아의 몰락 그리고 중국의 자본주의화 과정 등 이를테면 대립면을 상실한 과학의 질주에 다름 아니지요.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논리는 한마디로 자본축적운동의 파상적 확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미국과 유럽이 주도해 왔고 또 당분간 주도해 갈 세계질서 역시 서구 근대문명이 당면한 문제와 동일한 모순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서구문명에 대한 이해를 이러한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양학에 대한 관심의 출발점을 바로 이 지점에 세우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학에 대한 관심 역시 이러한 과제와 관련되는 범위에 국한하여 정리해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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