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진보를 조롱하는 말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 말은 진보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다른 의견의 존재야말로 어떤 세력, 조직,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이 이해관계만으로 똘똘 뭉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얼마나 추한가?
뜬금없이 이런 얘기를 꺼내는 까닭은 지난 13일 공개된 제2차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초안을 둘러싸고 한국의 환경운동가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 양상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갈등을 들쑤시는 게 마뜩치 않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가만히 두면 환경운동 내부에서만 설전이 오가다 사그라질 테니까.
하지만 평소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이 시민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강조해왔던 이들이 바로 환경운동가라는 걸 염두에 두면, 이런 토론이야말로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옳다. 그래서 비록 여기저기서 욕먹을 게 뻔하지만 (이번에도) 갈등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 번 해보려고 한다.
조·중·동·<경향신문> vs. <프레시안>·<한겨레>
사실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을 둘러싼 환경운동가 사이의 갈등은 이미 14일 아침의 조간 신문에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흔히 독자들이 '진보' 언론이라고 관행적으로 분류하곤 하는 <경향신문>, <한겨레> 또 <프레시안> 사이에서 이번 제2차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초안을 놓고서 상반되는 평가가 실렸다.
<경향신문>은 보수 언론과 마찬가지로 "원전 비중 목표 41%서 20%대로, 원전 확대 정책 사실상 백지화"라는 제목으로 이번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이 핵발전소 확대에 제동을 건 것으로 평가했다. 반면에 <한겨레>는 "원전 비중 낮춘다지만…2035년까지 12~18기 더 필요?"라는 제목으로 이번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을 사실상 핵발전소 확대로 평가했다.
<프레시안>도 마찬가지였다. 2035년 수요 전망을 과대평가한 현재의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으로는 비중을 20%대로 유지하더라도 핵발전소가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날 수밖에 없고, 그 개수는 (여러 변수에 따라서 구체적인 숫자는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많으리라고 예측했다.
이런 기사들이 독자를 만나고 있을 때, 비슷한 논쟁이 환경운동가 사이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수의 환경단체 관계자의 전언에 따르면, 일부 환경운동가가 제2차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초안의 의미를 사실상 핵발전소 확대로 평가한 언론 보도에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고, 이에 또 다른 환경운동가들이 반발하면서 내부 토론이 진행 중이다.
ⓒ프레시안 |
핵발전 축소 vs. 핵발전 확대
그렇다면, 이런 갈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얘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전제하자. 이번 제2차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초안을 마련하는 데는 환경운동을 대표하는 이들이 참여했다. 모두 오랫동안 환경운동에 헌신한, 자신의 분야에 전문가 뺨치는 식견을 자랑하는 이들이다. 당연히 이번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에 환경운동의 목소리가 강하게 반영되도록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초안을 평가할 때는 이런 환경운동가의 참여 자체를 중요한 사항으로 고려해서는 곤란하다. 그들의 노력 자체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일단 공개된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초안은 그 자체로 평가를 하는 게 맞다. '우리 편이 들어가서 얼마나 고생한 안인데…' 이런 식의 접근은 생산적인 논쟁 자체를 원천 봉쇄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를 염두에 두고서 몇 가지 쟁점을 정리해 보자. 우선, 이번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은 과연 핵발전소 확대에 제동을 건 것인가?
아니다. 혹자는 이명박 정부 때의 41%를 20%대(22~29%)로 축소한 것만으로도 진전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때의 41%는 정부 측 인사마저도 "달성하기 힘든 수치"(손양훈 에너지경제연구원장)라고 평가할 정도로 황당무계한 것이었다. 현재의 핵발전소 비중이 25% 수준인데 그걸 20%대로 유지하는 게 어찌 핵발전소 확대에 제동을 건 것인가?
이번 제2차 에너지 기본 계획을 어떻게 평가하든 누구나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수요 전망치의 누락을 염두에 두면 더욱더 그렇다. 알다시피, 산업통상자원부는 2035년의 전력 수요를 현재의 두 배(약 80%)로 부풀려 놓았고, 그대로라면 핵발전소 추가 건설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지어질 핵발전소 숫자가 몇 개인지는 중요한 논점이 아니다.)
이번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초안을 <경향신문>과 일부 환경운동가의 주장처럼 "핵발전소 확대에 제동을 건 것"으로 평가하려면, 최소한 2035년까지 핵발전소 비중을 10%대(약 15%)로 줄이는 수준은 되어야 했다. 기존 23기에 건설 중인 5기는 물론이고 계획 중인 핵발전소의 일부도 건설이 불가피한데 이게 어찌 핵발전소 확대에 제동을 건 것인가?
핵발전소 위험 vs. '전기 요금 폭탄'
이번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초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강조하는 또 다른 의미는 공급 중심에서 수요 관리로 에너지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를 공언한 것이다. 이런 변화 자체는 분명히 긍정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정말로 공언(公言)이 공언(空言)이 되지 않도록, 전력 수요를 낮출 수 있을까?
전력 수요만 낮출 수 있다면, 그것의 20%대를 차지하는 핵발전소 숫자도 줄어들 수 있으니 그야말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
보수 언론은 이번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의 의미를 "핵발전소 확대에 제동을 건 것"으로 해석하고선 잽싸게 "핵발전소=싼 에너지 포기"라는 '전기 요금 폭탄' 프레임을 제시했다. 복지 증세를 둘러싼 논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 사회에서 조세나 준조세 인상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 환경운동이 준비하는 수요 관리 무기가 전기 요금 인상 아닌가?
환경운동이 문제 삼는 건 가정용 전기 요금이 아니라 산업용 전기 요금이라고? 이런 반론이 과연 시민에게 얼마나 호소력이 있을까? 최저 임금, 대체 휴일을 둘러싼 논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업 비용 증가가 곧바로 '기업 경쟁력 저하=임금 인하 혹은 고용 축소' 등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는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시민의 '상식'인데.
즉, 이번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초안은 시민에게 탈핵의 정당성을 제시하기보다는, 탈핵의 전제가 되어야 하는 수요 관리 싸움마저 어렵게 만들었다. 후쿠시마 사고 또 불량 부품 스캔들 이후 조성된 '핵발전소 위험' 프레임이 '전기 요금 폭탄' 프레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핵발전소도 싫지만 전기 요금 폭탄은 더 싫다는 시민을 과연 환경운동이 앞으로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
전문가 운동 vs. 풀뿌리 운동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지적하자. 이번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초안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전문가 그들만의 잔치로 끝났다는 것이다. 시민사회 관계자들이 참여한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나, 그들 역시 전문가의 일원으로 참석한 것이지 평범한 시민(lay people)을 대표해서 참여한 것은 아니다.
송전탑 때문에 고생하는 밀양의 어르신, 핵발전소를 바로 옆에 두고 사는 지역 주민, 핵발전소가 자기 지역에 건설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주민,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때문에 수산물을 기피하는 시민 등의 의견이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의 초안을 마련할 때 반영되었다면, 그것의 의미를 둘러싼 논쟁은 또 다른 차원에서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순한 여론 조사가 아닌 평범한 시민의 참여 방식은 합의 회의, 시민배심원 등 숱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초안을 둘러싼 환경운동가 사이의 갈등은 한국 환경운동의 두 갈래 길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풍경으로도 볼 수 있다. 전문가 운동과 풀뿌리 운동의 본격적인 분화와 경쟁. 그러니, 환경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도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초안을 둘러싼 평가는 좀 더 열띠게 진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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